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Dec 19. 2020

연극 ‘아트’로 돌이켜 보는 관계

되돌리는 감상, 연극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제공]

연극 ‘아트’는 세르주, 이반, 마크 세 친구의 이야기다. 세르주는 헌딩턴 갤러리에서 시가 3억의 미술 작품 하나를 구매하고 친구 마크를 초대한다. 하지만 3억짜리 작품이 새하얀 캔버스라는 것에 경악하는 마크에게 부정적인 소리만 듣는다. 색감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사실여부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다른 친구 이반을 부른다. 그렇게 셋의 우정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이반과 하얀색 캔버스가 예술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크, 그리고 그림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세르주의 대립과 화해를 그린 연극이 ‘아트’다.


마크가 밉다.
마크는 세르주의 3억짜리 ‘하얀 판때기’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음에서 비롯된 감정과 자신의 실리를 바탕으로 세르주를, 그리고 이반을 바꾸려 한다.
사람의 성향은 다르다. 태어난 환경부터 사람은 제 각각이다. 자신이 살아오며 배운 것들에 확신이 생기는 만큼, 타인의 경험도, 취향도 확고한 것이다. 타인은 내가 멋대로 평가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평가의 결말은 옳고 그름을 넘어 결국 타인을 나의 입맛에 맞게 통제하는 정도의 행위에 그치지 않을 텐데 말이다. 건강한 관계에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정도의 인식과 나를 위한 판단이지, 남에게 판단의 결과를 들이밀 이유는 없다. 모순이다. 남에게 들이밀던 잣대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후에 자기가 행동할 수도 있을 모순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자신은 아닐 거라고 확신하는 말만큼 자기한테 관대한 말이 어딨을까. 너를 고찰하자. 마크야.

이반이 한 번에 20만 원가량의 돈을 쓰며 상담받던 정신과 의사의 말이 맴돈다.


 "내가 나인 것은 내가 나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당신인 것은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나는 나이고 당신은 당신입니다. 또 한편으로,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내가 나라면, 또 내가 나이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이라면,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도 당신이 아닙니다."


참으로 건강하지 못한 친구 관계다. 극의 마지막에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세르주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이들의 관계는 얼마 못 가 다시 삐걱대는 것이 보인다.
 ⠀
정은 오래 알던 관계를 정리하기 힘들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속된 사회에 의해 주관이 바뀌거나 혹은 수용했던 어떠한 성격들이 거슬려 더는 상대할 수 없게 된다면, 어렸을 때부터 단짝이던 친구조차 안 맞을 수 있다. 세 친구처럼.
싸우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됐나 하는 회의감과 허무함 다 알겠다.
마지막에 다시 거짓으로 시작한 회복기 관계를 망치기 싫다는 세르주의 대사가 말해 주듯, 오랜 친구를 잃기 싫음은 싸워도 친구에게 맞춰 참는다. 정이고 미련이다.


"제 친구 세르주, 제 가장 오랜 친구 세르주가 그림을 하나 샀습니다. 가로 150에 세로 120 정도 되는 그림입니다. 공간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한 남자가 그림 안에 있습니다."
 




가로 150에 세로 120 정도의 하얀 판때기 '앙뜨로와'는 세 친구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극을 보는 나도 건드렸다. 웃기다. 하지만 웃기는 와중에 찜찜하고 따끔하다.

작가의 이전글 뮤지컬 ‘레베카’는 소설 ‘제인 에어’의 오마쥬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