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래서 이 일 언제 그만둘 거야?"
".. 어?"
다 같이 오순도순 모여 케이크를 잘라먹는데 뜬금없이 인턴 동기 A가 내게 물어온다.
"너 예전부터 그만두고 싶다 그랬었잖아."
".... 내가 너한테 그 얘길 했나?"
"안 했나? 안 했음 말고."
웃으면서 어물쩡 넘어가는 능구렁이 같은 놈 때문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마치 내가 떠나길 원하는 듯한 어조에 짜증이 났다.
"걱정 말어. 나 50살 되고 나면 알아서 그만둘 거니까."
네 놈보다 1년이라도 더 오래 일할 거다,라는 유치한 말은 기어코 내뱉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내과 레지던트는 총 3년 과정이다.
3년을 끝마치고 바로 전문의 (Attending)로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요즘 들어선 대부분 펠로우 과정을 거치는 듯했다. 펠로우 과정을 선택하면 Cardiology (순환기내과), pulmonology (호흡기내과) 등 좀 더 세분화된 내과 분야를 선택할 수가 있다.
그중에서 Cardiology는 내과에서도 특히나 경쟁이 심했다.
이미 인턴 20명 중에서 반은 순환기내과로 목표로 삼은 듯했고, 나 또한 그 많은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이미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선배들 중에서 다시 펠로우를 지원하는 분들도 몇몇 있었다. 덕분에 다른 과들과 달리 순환기내과는 늘 경쟁자들로 붐볐다. 의대 진학때와 비슷하게 교수님들에게 추천서를 받기 위해 눈도장을 찍고,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쓰기 위해 초록과 의학 사례보고를 열심히 써나가야 한다.
'쟤는 이번 컨퍼런스 때 초록을 몇 개나 제출했지?'
'쟨 뭔데 벌써 인턴 때 논문으로 상을 받아?'
'이 선배는 비자 때문에 1년 쉬니까 나랑 같은 시기에 지원하겠지?'
안 그래도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쉴 새 없이 고민을 하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피곤과 짜증이 가시질 않는다. 인턴 초반에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는 서로 숨기는 게 더 많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사례보고 (case report) 작업을 하고 있으면 은근슬쩍 뒤에 다가오며 무슨 사례냐고, 어디에 낼 거냐고, 자기도 같이 쓸 테니 공동 저자로 넣어주면 안 되냐는 A 같은 놈 때문에 진절머리가 났다.
나를 위하는 말은 다 하면서 내가 먼저 작업하기 시작한 사례보고의 첫 저자를 가져간 선배가 미웠다.
자기는 직접 본 적도 없는 내 환자로 사례보고를 적어서 컨퍼런스에 첫 저자로 제출하겠다던 동기도 얄미웠다. 공동 저자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된 놈들 때문에 나마저 휩쓸려 초조해지는 게 싫었다. 가족처럼 서로를 챙겨준다던 동기들은 어디 가고 서로를 뜯어먹지 못해 안달 난 하이에나 무리에 둘러싸인 듯했다.
여기까지 오기도 참 힘들었는데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 애써 뒤떨어지지 않으려 발돋움하는 내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또 다른 목표를 이뤄낼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자주 들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억지로 펠로우가 된다 한들 그 이후에 지독한 경쟁이 끝나기나 할까.
마음이 이렇게 싱숭생숭하다 보니 긴장이 풀어지면 나약한 속마음이 툭툭 새어 나온다.
그러니 얄미운 동기 놈이 저런 말을 해도 딱히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는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그래도 레지던시 3년만큼은 미련하게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 끝에 전문의가 되었든, 펠로우가 되었든, 일본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든 간에 일단 졸업만이라도 무사히 하는 게 현재 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