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빅토리 노트>의 작가는 노자의 사상을 인용해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고 경고했다.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위해서는 지나친 열심과 부지런을 금지하자 이야기한다. 처음 그 말을 보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래, 맞아.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점이 생기더니 이제는 큰 물음표가 되어서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한 적이 있는가?
어린 시절부터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떠올려봤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달리기를 할 때면 항상 나는 꼴찌였다. 열심히 뛰나 안 뛰나 별반 큰 차이는 없었다. 어리지만 재빠르게 나는 나의 수준을 파악했고, 뛰고도 꼴등을 하느니, 적당히 하고 꼴등을 하는 걸 택했다. 이러나저러나 점수는 최저점인데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눈에 적당히 티 나지 않는 수준에서 뛰었다. 대충 뛰다가 넘어져서 중도 포기를 해도, 나를 신경 쓰는 체육 선생님은 없었다. 힘들게 열심히 뛸 필요가 없었다.
시험공부할 때도 비슷했다. 나는 100점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다. 어느 정도 원하는 점수를 받을 만큼만 공부했다. 이 정도 공부하면, 내 목표 점수에 나오겠다 싶으면 멈췄다. 하나라도 더 맞추기 위해 공부하는 건 나와는 맞지 않았다. 해도 안 될 과목 같은 경우는 좀 과감하게 패스했다. 과목에 따라 적당히 틀려도 괜찮다고 여긴 과목은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 때로는 과감하게 다 틀리는 걸 선택하기도 했다.
심지어 살 뺄 때도 그랬다. 10킬로그램 정도 왔다 갔다 하던 나의 체중은 20대 중반에 이르러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맞는 옷도 없고, 건강상에도 문제가 생기면서 살을 빼기 시작했다. 20킬로그램을 빼고, 거기에서 그만뒀다. 내가 원하는 만큼 날씬해져서 그만둔 게 아니다. 더는 빠지지 않는 정체기에 접어든 것도 아니었다. 20킬로그램을 빼고 나니, 허리둘레는 4인치 정도 줄었고 주변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뺄 만큼 뺀 것 같다며 나는 다이어트를 멈추었고 유지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육아에 전념하지 않았다. 아이 돌봄도 중요하지만 자기 돌봄도 중요하다 주장하며, 자유롭다 못해 아이들을 방임에 가까운 수준으로 둘 때도 있다. 게으른 엄마를 둔 덕에 아이들은 일찍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아이들 핑계로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도 육아에 전념하지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엄마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하고 넘어가는 사람이라, 번아웃 증후군 또한 제대로 앓아본 적이 없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더 큰 힘을 입어 적당히 살아가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내가 지금껏 살아오지 않은 다른 길을 가야 할 때인 것 같다. 열심히 살아온 이들과는 반대로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은 최선을 다하는 삶이다. ‘적당히’ 자기 합리화하며 성과는 나지 않는다고 나 자신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무엇 하나라도 ‘열심히’ 해보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내가 최선을 다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떠올릴만한 것이 있기를, 어느 한 시기라도 열정을 다해 살아봤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