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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 Mar 17. 2022

세 번의 자가격리와 두 번의 코로나

우리 집 코로나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가족은 세 번의 자가격리와 두 번의 코로나를 겪었다. 코로나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격리에 들어간 사람은 백신 접종 대상자가 아닌 아이들이다. 큰 아이는 지금까지 세 번의 자가격리와 두 번의 코로나를, 그리고 작은 아이는 2번의 격리와 언니 때문에 1번의 셀프 격리, 그리고 한 번의 코로나를 겪었다.



1. 첫 번째 코로나와 격리


   첫 번째 코로나는 거리두기도 심하고 역학조사도 심한 작년 3월이었다. 3월 1일, 아이가 유일하게 다니던 태권도 내 확진으로 결국 우리 아이도 확진이 되었다. 코로나 시작 이후 처음 받아본 PCR 검사에서 아이는 양성이 나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통제불능 순간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뒤처리나 피해는 모르겠고, 그냥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길 간절히 원했다.


   밤새 잠 못 이루다, 아침이 되어  아침에 아이 학교와 작은 아이 유치원에도 전화를 건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선생님, 저 큰 애가....." 더 이상 말을 이을수 없었다. 내 눈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선생님도 감 잡으신 모양이었다. 전화를 붙들고 울다가 간신히 당분간은 아이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족들, 지인들과 통화하면서도 나는 계속 눈물만 흘렸다. 나는 큰 아이와 함께 생활치료센터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예상했던 대로 나도 양성이 되었고 증상이 심해져 병원까지 이송되었고, 집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와도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던 둘째 아이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집에 굴러다니던 내 증명사진을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쏟으면서 내게 왔다. 내가 코로나로 없는 동안 그 사진을 보면서 엄마 보고 싶다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자기도 데려가 달라던 아이.... 엄마가 언니를 좋아해서 언니만 데리고 갔던 걸로 생각했나 보다. 코로나 걸리지 않은 너를 위해 어쩔 수 없다 해도 아이는 아직 어려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2. 두 번째 격리


   그 이후 백신이 나오면서 코로나가 끝날 줄 알았는데 델타 변이,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나오면서 코로나는 점점 더 심해졌다. 시간은 흘러 격리 기준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밀접접촉자의 경우 14일 격리에서 열흘 격리로 바뀌게 되었다. 연말에 큰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확진자가 하나 나왔다.  출근하는 도중에 학교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 아이가 확진 학생과 동선이 겹쳤다고 한다. 어디서 겹친 거냐 물으니 방과 후라 한다. 코로나 걱정에 유일하게 큰 아이는 전교에서 5명 듣는 방과 후를 딱 하나만 듣고 있었는데, 그 5명 중에 한 명이 확진이 나온 것이다. 방과 후를 화요일에 들었고 이미 3일이나 지나서 역학조사 기간에 포함이 안 될 줄 알았는데 화요일부터 역학조사 기간이라 했다. 그 길로 다시 학교로 가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학원의 경우에는 마스크 착용과 한 시간 미만인 경우에는 밀접접촉자가 되는 일이 드물다. 추가 확진자가 나오는 경우에는 밀접 접촉으로 되기도 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부분은 수동 격리로 끝나게 되는데 아이는 그날 바로 밀접접촉자라며 격리에 들어가야 한다고 연락 왔다. 교실도 넓었고 아이와 직접적인 접촉도 없었고, 실제로 한 교실에 있었던 것은 약 한 시간도 안 되는데, 밀접 접촉이라니 왜 그러냐 여러 번 물었지만 대답은 역학조사관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기에 안 된다는 것이다. 학원이었다면 수동 격리로 끝났을 텐데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라 밀접 접촉이었던 것 같다. 큰 아이만 밀접 접촉자라 큰 아이만 격리에 들어간다면 나와 다른 가족들은 일상생활은 가능하다 했다. 하지만 밀접 접촉자가 집안에 있기 때문에 둘째 아이도 등원할 수 없었다. 결국 아이들만 격리에 들어갔다.


   그때는 코로나에 대한 걱정보다는 아직 어린아이 둘만 집에 두고 가는 거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나는 삼시 세끼를 다 준비해야만 했다. 일어나서 아이의 아침밥을 먹이고 아이 공부를 챙기고 저녁 식사까지 미리 다 식판 그릇에 담아두고 국이나 찌개도 미리 준비를 해놨다. 출근을 좀 뒤로 미루면서 나는 아이들 점심까지 챙겨주고 택시 타고 출근했다. 일이 끝난 이후에는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냈다. 원래 격리 기간은 열흘이지만, 확진자와 접촉한 후 며칠 후부터 격리에 들어가게 되어서 격리는 생각보다 빨리 풀렸다. 격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해제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게 마지막 격리가 될 줄 알았다. 우리 가족에게 코로나 관한 문제가 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다시 3월

   3월이 다가오면서 작년에 코로나로 겪은 일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 처음 확진자와 접촉했다는 전화를 받던 그 순간의 기억부터 새벽에 울린 보건소 전화,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들면서 역학조사관과 보건소 관계자들 그리고 가족, 지인과 통화하면서 정신없이 울고 또 울었던 기억. 39도 넘는 고열과 통증으로 너무 아팠던 기억까지 하나하나 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찍었던 사진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글 드라이브에서는 작년 사진이라며 자꾸만 내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올 3월은 부디 별일 없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3. 두 번째 코로나와 격리


   아이들이 학교랑 유치원에서 받아온 자가 키트로 검사를 했다. 아무 증상도 없는 아이들이라 별일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양성이 나왔다. 두 아이 모두 양성이었다. 아이의 학교나 학원에 이미 확진자가 여럿 나왔고 혹시나 했는데 아이도 결국 확진되었다. 자가 키트에 대한 불신이 강했던 내가 직접 아이 둘 검사했는데, 생각보다 높은 정확도에 놀랐다. 우리 가족이 처음 겪은 코로나 1년이 지나자 격리 기준이나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확진자의 경우도 격리는 7일이었다. 이전까지는 격리만 하더라도 격리 물품이 집으로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격리 물품 지급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코로나 지원금을 받은 다음 날 두 아이 모두 확진되었다.


   정말 내가 자가 키트로 잡아내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은 누구도 코로나에 걸렸을 거라고 의심하지 못할 만큼 증상이 전혀 없다. 자가 키트 아니었더라면 무증상 전파자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코로나를 다 이겨내서 아무도 모르게 지나갔을 수도 있다. 다행인 것은 한 명의 확진 후, 또 다른 아이 확진이 아니라, 두 아이 모두 동시에 확진이라는 사실이었다. 시간차를 두고 확진이 되면 더 오랜 시간 동안 격리를 해야 하는데 둘이 나란히 확진되어 격리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델타 바이러스 때도 그랬고, 오미크론 때도 그랬고, 초기 코로나 바이러스에 비해 증상이 경미하다는 이야기가 언론에서 많이 나왔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게 아니었다. 40도가 넘는 고열로 아이가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언론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소위 전문가라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경증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에 경증이라 하기엔 아이가 코로나에 걸려서 고열로 아플 때, 부모들이 감당해야 할 불안과 공포,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답답함은 생각보다 많이 크다. 그래서 언론에서 무증상, 경증을 이야기할 때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 아이 둘이나 무증상으로 코로나를 끝마치게 되자 정말 이 정도로 무증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면서 감사할 뿐이었다.


   목이 살짝 아프다는 둘째는 목이 아프니 호올스를 먹어야겠다며 하나 달라고 해서 하나를 주고 나면 안 아프다고 한다. 정말 목이 아픈 건지 호올스를 먹고 싶은 건지 알 수는 없을 정도였다. 집에 미리 구비해둔 비상약들이 쓸쓸해 보일 정도였다. 큰 아이는 목이 아프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정말 아픈 곳 하나 없이 왕성한 식욕만 자랑할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작년과 같은 시기에 아이들은 격리였다. 이번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겨울에 격리 들어가서 겨울 공기가 사라지고 봄기운이 돌 무렵에야 아이들은 바깥공기를 마실 수가 있었다. 신학기에 새로 만난 친구들과 선생님과 들뜬 시간을 보내야 할 이 시기에 다시 또 격리라서 마음 아팠다. 2020년에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초등 입학식도 치르지 못하고 3월에도 학교를 갈 수 없이 나 홀로 집에 있어야 했던 큰 아이를 생각하면 3월이 정말 마음 아픈 달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작년 처음 아이들끼리 격리할 때보다도 몇 달 사이에 아이들은 좀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처음 아이들끼리 격리할 때만 하더라도, 대변 후 뒤처리가 문제였다. 큰 아이가 대신해주기도 했는데, 몇 달 후 이번 격리 때는 둘째 아이가 제법 야무지게 혼자서 처리했다. 따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아이 홀로 터득한 것 같다. 여전히 내가 출근해야 할 순간이 오면 작은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는 왜 일을 가야 하는 거냐 한다. 때로는 내가 계속 아이 주변을 맴돌면서 잔소리를 하면 엄마는 언제 일 갈거냐며, 얼른 가라고 하기도 한다. 엄마 없는 시간에는 TV도 볼 수 있고 맘껏 놀 수 있다는 생각에 나를 빨리 집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직 코로나에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자가격리 한 번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집은 벌써 세 번의 격리와 두 번의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갔다. 격리된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걸 다 케어해야 하며 출근해야 하는 나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처음보다는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아이들도 부모와 떨어져서 아이들만 집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둘 사이에 좀 더 끈끈한 자매애가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들 내면도 좀 더 단단해졌으리라 믿는다.


   내년 3월에는 늦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살금살금 다가오는 봄기운을 아이들이 직접 맘껏 느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작년에 격리 14일에서 지금은 7일이 줄어 격리가 7일뿐인데, 내년 이맘때는 7일 격리조차 사라져서 이 모든 게 다 추억으로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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