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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Nov 30. 2023

씁쓸한 맛의 기억

학원까지 뛰어오느라 땀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들을 보니 보라는 안쓰러웠다.  


"얘들아. 편의점 가서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와."


보라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아이들에게 주었다. 와 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빠르게 튀어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쭈쭈바 하나씩을 입에 물고 교실로 들어왔다.


끼익.

그사이 쭈쭈바를 입에 문 채 민주는 책상을 끌어 보라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민주는 수학이 좋았다. 학원에 오자마자 책상을 당겨 항상 보라 앞에 가져다 놓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업을 들었다. 다른 친구들도 질세라 책상을 당겨 앞으로 오지만 명당은 민주 차지였다.

수업을 시작하려니 경진이는 갑자기 거울을 꺼내더니 앞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경진아 집어넣어야지."

"네"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지만 경진이는 주머니에 집어넣고 책을 펼쳤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경진이는 틈이 생기면 머리를 빗기 바빴고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며 수업의 흐름을 끊곤 했다. 예민한 중2 여학생이기에 무작정 화를 낼 수는 없었고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되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에어컨이 있지만 한 여름에 수업을 하려면 아이들도 진이 다 빠지겠지. 보라는 아이들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수업 중 일어나는 체력 소모에 식은땀이 흘렀다.


며칠 후, 어김없이 가장 앞자리로 와야 할 민주가 오늘따라 조용하다. 말도 없고 낯빛이 어두웠다.


"민주야 무슨 일 있었어?"


그때 민주는 보라의 말 한마디에 흐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보라는 등을 토닥이며 찬찬히 물었다. 민주는 꺽꺽 거리는 소리를 간간이 내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꽤나 이쁘장한 민주는 학교에서도 친구가 많았고 선생님들께도 사랑받는 아이였다. 그런데 얼마 전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가장 친했던 친구와 싸우게 되었고 그다음 날부터 친구들의 괴롭힘이 시작됐다고 한다.


"너를 도와주는 다른 친구는 없었니?"

"애들이 그 친구를 무서워해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친구 말고 다른 친구들도 전부 저에게 욕을 해요."

"네가 잘못한 건 있는 거야?"

"그냥 작은 일로 싸웠어요. 친구가 옷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다음 날 언니가 입어야 해서 안된다고 했거든요."


민주의 이야기는 점점 끔찍했다. 급식도 못 먹을 정도로 교실 밖을 나가지 못했고 엄마가 학교에 찾아와도 조롱만 당했다고 했다. 그래서 화장실에 숨어서 빵을 먹는데 화장실 문을 발로 차고 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나왔다는 말까지.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 경진이와 다른 친구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어떤 쌍노무 시기들이 우리 이쁜 민주를 울렸어!! 선생님이 혼내주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루종일 울어 퉁퉁 부은 민주가 조금이라도 위로받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경진아. 민주가 오늘 많이 속상한가 봐. 잘 좀 달래죠."


보라는 경진이와 민주가 그래도 가까운 사이라 생각했다. 경진이가 처음 학원에 왔을 때 민주의 소개로 왔다고도 했고 수업 중 그래도 둘이 가장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까. 그리고 보라는 울지 말라고 하고는 수업을 위해 다른 반으로 향했다.

중3 수업이 한창일 때 누군가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수학선생님. 잠시 얘기 좀."


어지간하면 수업에 큰 방해를 안 하시는 원장님이 수업 중인 보라를 호출했다. 보라는 아이들에게 풀 문제를 정해주고 학원 교무실로 갔다. 잠시 앉아보라던 원장님.


"수학 선생님이 경진이한테 썅년이라고 하셨다던데......"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서 지금 학부모님 학원으로 찾아오신다고 하고 난리세요. 일단 그럴 분 아니라고 하기는 했는데 통화를 직접 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말도 안 돼요 원장님. 학생한테 그것도 여학생한테 썅년이라니요."

"알죠. 그래도 일단....."


원장님도 학부모님께 꽤나 시달린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우선 학부모님하고 통화를 해야 했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oo학원 경진이 수학 선생님입니다."

"네. 선생님 우리 경진이한테 썅년이라고 하셨다면서요!"

"어머님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좀 전에 교실에서 잠깐 보고 저는 다른 수업을 들어갔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민주를 괴롭혔던 친구가 경진이었기 때문이다. 보라는 그 사실을 몰랐고 경진이가 들어왔을 때 했던 말이 경진이는 자신에게 한 말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어머님. 저는 민주와 싸운 학생이 경진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언행이 거칠었던 건 인정하지만 경진이를 겨냥해 썅년이니 뭐니 욕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럼 우리 애가 지금 과장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에요?"

"우선 그런 오해를 했다면 제 책임이죠. 죄송합니다. 어머님 그럼 학원에 경진이랑 같이 오셔서 이야기하시죠."

"됐어요. 우리 애한테 무슨 소리 하실 줄 알고 애를 데려갑니까? 아이 아빠가 화가 많이 났으니까 같이 가겠어요. 그리고 이번 일도 그렇지만 원래 민주랑 경진이랑 차별하셨다면서요!"

"어머니 차별이라니요."

"민주는 매번 문제도 알려주셔 놓고는 경진이는 그냥 놔두셨잖아요."


어머님. 따님이 매번 머리만 빗느라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겁니다. 아이스크림까지 먹여가며 우쭈쭈 해서 수업했는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통화상으로 언성을 높인 들 해결될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차별한 적 없습니다. 조금 더 질문하는 학생이라 알려준 것뿐이에요. 우선 학원에 오셔서 이야기하시죠."


그 후에도 계속되는 학부모님의 이야기와 그저 죄송하다고 해야 했던 보라. 하지만 학원에서 대면하게 되면 다 이야기해야겠다 생각했다. 통화가 끝난 후 원장님께도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무거운 마음에 퇴근을 했다. 오랜 시간 학원 생활을 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음이 쓰리면서 착잡했다.

다음 날, 학부모가 오기로 한 시간. 원장님은 자신이 이야기하겠다면 보라를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보라가 직접 해명하겠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처음에는 보라가 학부모들에게 된통 당할까 걱정되어 그런 줄 알았다. 원장님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수업을 그대로 진행했고 두 시간 정도 학부모와 상담을 이어간 것 같았다. 그리고 모두 돌아간 후 원장님은 다시 보라를 교무실로 불렀다.


"오해는 푸셨어요?"

"그냥 뭐......"


원장님이 자꾸 얼버무리시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섭섭하게 듣지 말고. 그냥 우리 학원 책임이고 무조건 죄송하다고 했어요. 수학 선생님 그러실 분 아닌데 실수하신 것 같다고."

"아니 원장님. 물론 그런 말을 쓴 건 분명 잘못한 거지만 하지도 않은 말인데 제가 한 걸로 돼버리잖아요."

"그렇다고 애를 내보낼 수는 없잖아요. 이 동네 몰라요? 저 아이 하나 나가면 다른 애들도 줄줄이 나갈 수도 있고."


순간, 아 장사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라는 직접 그때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혹시나 있었을 오해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라는 욕쟁이 강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소문 안 내신다고 하니까 뭐."

"무슨 소문이요. 어떤 소문이요? 제가 썅년이라고 했다고요? 아니했어야 하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이라 오해할 수도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 한걸 텐데 그저 저 하나 욕쟁이 선생님이 되고 사과하면 끝나는 일이에요?"

"답답하시네. 더 이상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합시다."


원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혀를 끌끌 차며 보라를 지나쳐갔다.


"원장님!"

"나참. 어른이 그럼 애랑 싸울 거예요? 나잇값을 하셔야죠."

"제가 애랑 싸운데요? 아닌 건 아니다고 말하고 사과할 건 하겠다잖아요!"

"됐어요 됐어."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버럭 화를 내던 원장님은 교무실을 나가면서 다시 뒤를 돌아보셨다.


"계속 다닌다고 하니 티 내지 마시고 잘 챙겨주세요."


허. 보라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이랑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혹시나 아이가 마음이 다쳤다면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고 대신 지금 민주에게 하고 있는 행동은 바르지 않은 것이다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원장님의 한마디. 보라 선생님의 실수라는 그 한마디에 아이를 바로잡아 주지도 엉켜버린 상황을 다시 풀지도 못하게 돼버렸다. 쌩하니 퇴근해 버린 원장님에게 다시 전화해서 따질 수도 없고 보라는 그저 허탈했다.

그날 저녁, 보라는 절친인 가현이를 만났다.


"소주 한잔도 못 마시는 게 무슨 술을 먹자고 전화야."


가현이는 보라의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주며 말했다.


"오늘은 못 먹어도 먹고 싶네."

"무슨 일인데."


보라는 가현이에게 이틀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얘기했다.


"미친 거 아니야?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

"그럼 뭐 어째."

"야 당장 때려치워."

"뭘 당장 때려치워. 휴. 학원일 하면서 오늘같이 마음이 무너지는 건 처음이다. 내가 언제 너희 술 마실 때라도 마신 적 있냐? 근데 이 한잔이 어쩌면 답답한 마음을 풀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으이그 등신 상 등신."

"근데 내가 더 마음이 아픈 건. 이번일로 민주도 도와주지 못했다는 거야. 만약 내가 직접 경진이 부모님 하고 이야기를 했다면 어떻게 도움은 줄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말했다가 더 심하게 왕따 당하면 어쩌냐?"

"그래도. 어른이잖아 우린.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지."


가현이는 고구마라며 가슴을 탕탕 쳤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보라에 대한 오해도 속이 상했지만 민주가 더 걱정이 되었다. 보라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보라도 가현이를 따라 가슴을 탕탕 치다가는 소주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원래는 소주에서 나는 독특한 소독약 냄새 때문에 보라는 소주를 절대 먹지 않았다. 친구들 만날 때면 맥주 조금 마시거나 탄산음료로 대신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았다. 꼴딱 넘어가는 소주 끝맛에서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야 소주가 달달한데?"

"소주에 소자도 모르는 게. 네가 엄청 스트레스를 받긴 했나 보다. 소주가 달다는 거 보니. 이게 가장 피곤할 때, 가장 힘들 때, 가장 기쁠 때 제일 달달하거든."


가현이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라의 소주잔을 다시 채웠다. 보라는 겁도 없이 연거푸 세잔을 마시고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달긴 뭐가 달다는 거야. 야 일어나!"


가현이의 외침에도 보라가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마 가현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간 듯했다.

속이 쓰리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두통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라는 대충 밥을 챙겨 먹고 준비를 하고 학원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출근한 보라에게 원장님이 다가왔다.


"경진이 안 온다네요."

"아 그래요?"


시큰둥한 반응에 뭔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 괴롭히다가 아이가 많이 다쳤나 봐요. 학폭위가 열린다네. 민주 괴롭힌 것도 같이."


보라는 원장님을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학폭이 심했나 보더라고요. 뭐 아무튼 그렇게 아시고 수업 진행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혹시 학원에 온다고 해도 받지 않으려고요."

"아...... 알겠습니다."


아마 학폭위까지 열리는 학생을 받았다가는 모범생 학부모님들의 반발이 일어날 테고 그럼 더 많은 학생을 잃을 거란 계산이었겠지. 그런데 자신을 위하는 척하는 말에 보라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달달했던 어제의 소주 맛이 목 끝에서 다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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