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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거 교과서에 나온 거 맞아

엄마도 함께 읽을까 (18)

by 김세인

여고생 시절, 내 짝은 국어 시간이 되기 전이면 거울을 꺼냈다. 그리고 한용운 시를 외웠다.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면 조용하고 참하던 친구의 볼은 수줍은 봄꽃처럼 발그스레해졌다. 사실 국어 선생님은 잘 생긴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입담이 좋았다. 국어 교과서에 나온 시를 읽는 선생님 모습은 시인 같았고, 우리는 잠시나마 시어의 함축적 의미 따위는 잊고 그의 매력과 동시에 교과서 속 작품에 빠져들었다.


내 기억에 여전히 남는 작품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날따라 돈벌이가 좋았던 한 인력거꾼의 하루. 사흘 전부터 설렁탕을 먹고 싶다던 병든 아내, 세 살 배기 아기를 둔 그의 삶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운수 좋은 날이라는 반어적인 제목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는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름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살면서 가끔 그 작품이 생각났다. 문제 풀이로만 대했던 작품들은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내 마음에 들렀다 간 소설은 세월이 흘러도 떠오르곤 했다.



지난 겨울방학이 다가올 즈음, 나는 온라인 서점 앱을 클릭했다. 긴긴 방학을 삼식이 초등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버텨야 했다. 겨울방학은 영어, 수학 학원 특강보다는 책 몇 권을 둘러메고 동굴에 들어가 겨울잠 자기 좋은 시기이다. 언제까지 그런 겨울잠이 유효할지 모르지만 나는 최대한 아이들의 동굴을 유지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읽을 만한 신간이 나왔나 클릭했다. 메인 화면 중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중 1 소설’이 떴다. 만화책들을 쌓아놓고 읽을 게 뻔한 데도 이런 책 한 권쯤은 사고 싶다는 엄마의 흑심은 숨길 수 없어 주문 버튼을 클릭했다.


국어 점수에 도움 될 만한 책이니 미리 읽어보라는 권유 대신 무심하게 신간 책들 사이에 끼워 놓았다. 딱히 매력적이지 않은 표지와 너무 반듯한 글씨체로 쓰인 제목. 내가 봐도 손이 가진 않았다. 다른 책들에 이리저리 치여 외면당할 게 뻔했다.


방학이 시작한 지 한참 지나고 뒹굴거리던 아이가 침대에서 꼼짝 않고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학문제집은 책상에 그대로 펼쳐진 채.


“뭐 해? 무슨 책인데 그렇게 심각하게 읽어.”

엄마, 이 소설들 교과서에 나온 거 맞아? 중 2 소설도 나왔으면 주문해 줘. ”


딸은 교과서를 의심했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중 1 소설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진짜 재미있다며 씩 웃는 딸의 미소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문해력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수록된 건 아닐까 의심되었다. 나는 혹시나 〈운수 좋은 날〉이 있지는 않나 책을 펼쳐보았다. 목차를 보니 익숙한 작품은 세 개뿐이었다. 박완서의 〈자전거 도둑〉, 김유정의 〈동백꽃〉, 허균의 〈홍길동전〉.


첫 소설 제목은 〈오후 4시, 달고나〉였다.

요즘 드라마 제목 같은 세련된 느낌. 첫 작품이 김유정의 동백꽃이었다면 나는 책장을 대충 훑어 넘겨버렸을지 모른다. 오후 4시와 달고나. 두 단어의 조합은 잘 모르겠지만 달고나라는 단어부터 나의 편견을 달달하게 녹이기 시작했다. 차은우 같은 남자주인공이 나올 것만 같은 제목과 달리 치매 할아버지가 먼저 등장한다. 엄마는 달고나를 만드는데 열성인 여중생 ‘나’에게 할아버지한테 저녁 먹기 전에 또 달고나를 줬다가는 가만 안 둔다고 노려본다. 진짜 달고나를 받아야 할 남자 한승규, 그리고 절친 규리를 둘러싼 이야기.


“엄마, 뭐가 그렇게 재밌어? 한승규 나쁘지 않아? 진짜 둘 다 배신자야.”


삼각관계에 몰입한 딸과 달리 나는 사실 엄마와 아빠의 신경전에 감정 이입이 되어 킥킥거리고 있었다.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가 밥상이 나올 때마다 아들에게 식당 아줌마 돈을 주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처음에 장난 반으로 받았던 밥값 만 원이 점점 엄마 지갑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날강도라는 아빠의 황당한 표정과 비싼 걸 먹어 미안하다는 할아버지의 멋쩍음을 상상하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


그나저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중학생 3명의 얽힌 풋사랑 이야기랄까. 딸은 자기가 주인공이 된 양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와 친한 친구와 함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배신당한 연극 주인공이 되어봤을 테다.


〈오후 4시, 달고나〉 외에도 비교적 최근 소설들이 많았다. 시대적 배경을 따로 공부해야 하는 소설보다 동시대에 발표된 소설들은 아이들에게도 쉽게 읽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부 아역 배우 은비의 마음 변화, 뺑소니로 몰린 옥수수 장수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현성, 슬쩍 훔친 수박을 둘러싼 육 인방 절친들의 갈등.......


나는 교과서에 나온 소설이라는 것도 잊은 채 술술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멈추고는 다음 날을 위해 아껴두었다. 마치 박완서 선생님의 단편을 읽다가 내 속내를 들켜버린 날처럼. 읽는다는 일의 짜릿함을 느꼈던 때처럼.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독자와 비슷한 나이의 또래다.

초등학생인 딸은 언니들의 세계를 미리 간접 경험해 봤을까. 작품 속 주인공과 같은 고민을 해 보고, 이유 없는 듯한 심술도 공감해 보고, 예기치 않은 사건이 생겼을 때 들이닥치는 감정선도 따라가 봤을까.


오해받은 채로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해명하는 과정이 괴롭다고 해서 그대로 내버려 두는 건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 〈커튼콜〉 중


작품 속 인물들은 자신이 겪은 감정과 경험을 천천히 분별해 나갔다. 양심을 거스르는 상황과 마음을 알아차렸다. 성급히 문제가 해결되거나 어른들이 나서지 않아도 스스로 문제를 바라보고,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 나갔다.




넷플릭스 시리즈와 영화는 분명 재미있다.

좋은 콘텐츠도 많다. 매력적인 남녀 배우들의 눈빛과 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예술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영상들의 장면 한 컷 한 컷이 나를 깊은 생각으로 이끌어 준 적은 흔치 않았다. 기획 의도를 넘어 과하게 잘 생기거나 예쁜 배우의 패션에 매혹되거나 키스신에 가려졌다.


소설은 나에게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읽는 순간에는 다 이해되지 않은 작품 속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은은하게 마음의 고민으로 남았다. 생각의 끈을 끊지 않고, 좀 더 길게 끌어주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소설 속 그 또는 그녀가 나만의 해석으로 이해되는 순간이 왔다.


사춘기가 되면 거리를 둬야 하는 엄마로서 내가 속속들이 공감해 주지 못하는 감정선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 주는 일만으로도 이 소설들이 고마웠다.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황급히 읽고 억지로 공감하기보다 미리 읽어보는 소설은 꽤 괜찮은 선행이 아닐까 생각했다. 주위에 엄마들을 붙들고 같이 해 보지 않겠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부모인 우리와 아이들이 문학의 묘미를 안다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신선놀음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선행이라는 말로라도 설득해 보고픈 마음.


어려서부터 사교육으로 다져진 수학과 영어는 따라잡기 힘들다 하더라도 한국 작가가 우리말을 벼르고 벼른 단어들로 쓴 문학작품에 매력을 느낀 아이들이 점수도 잘 받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국어 교과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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