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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 읽은 연애 동화

by 김세인

청룡 영화제에 등장한 한 남자의 눈빛을 보고 죽은 연애 세포가 살아날 뻔했다. 살아나면 또 어쩔 텐가. 할 수 없이 남편의 얼굴에 자꾸 남자배우를 빙의해 보며 혼자 킥킥 웃어댔다. 빈티지한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이별을 노래하는 여가수와 턱시도를 입고 수줍은 듯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남자배우의 공연이 한참 아른거렸다.

전에는 관심 밖이었던 동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이 훅』.


커피를 한 잔 옆에 두고 동화책을 펼쳤다. 표지부터 살짝 핑크빛 연애 느낌이다.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 닿을 듯 말 듯한 그림과 분홍색 글자색이 제목과 어울렸다.


동화 속에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등장한다. 종수와 선정, 호태와 담이, 지은이는 서로 친한 친구이자 커플들이기도 하다. 선정이는 수학시험 문제를 하나만 틀려도 울음을 터뜨리는 모범생, 수학 점수 같은 건 연연하지 않는 종수는 농구파 남학생. 둘의 연애는 반 아이들을 꽤나 놀라게 한다. 유치원 때부터 동성친구처럼 지냈던 호태와 담이가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게 되는 사이 호태가 좋아진 담이의 친한 친구 지은이의 이야기까지.


고학년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넷플릭스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하면서도 진지하게 묘사된다.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찾아온 설레는 감정, 내가 좋아하는 일을 같이 해 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때론 내 마음과 달리 꼬이기도 하는 상대와의 엇갈림을 경험하게 된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이들의 이성을 향한 감정, 엄마로서는 어떻게든 막고만 싶은 아이들의 연애 이야기가 꽤 현실적으로 펼쳐졌다.


아이들이 고학년즈음 되면 학교에서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사귄다거나 하는 말이 들려오는 시기이다. 나도 처음엔 귀여웠던 아이의 말이 살짝 민감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 아가씨도 고학년이 되자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나는 겉으로는 쿨한 척하면서 아이의 핸드폰 문자에 그 남자아이의 이름을 몰래 찾아보곤 했다.


“의외로 엄선정이랑 종수 이야기가 재밌더라.”

옷방에서 거울을 한참 보고 있는 딸을 보니 책 속의 아이들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엄마도 그랬어? 나도 나도.”

“종수의 한 마디가 인상적이었어.”

“어떤 말? 이제 너랑 사귀는 거 그만하고 싶다고 한 말?”

“아니. ‘난 그냥 너를 좋아했어’라고 한 말.”

“그게 어때서? 사귀니까 당연히 좋아한 거 아니야.”

“종수는 선정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잖아. 선정이가 공부를 잘해서 종수가 선정이를 좋아한 건 아니었잖아.”

“선정이는 종수 때문에 수학 문제집을 직접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학원 가기도 바쁜데 종수가 공부를 더 잘 하게 도와주려고 말이야 .”

“그게 종수가 선정이한테 원하는 거였을까?”

“글쎄....... ”


아이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갑자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는 사람처럼.

도대체 분수를 소수로 왜 바꿔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선정이가 만들어준 수학문제를 애써 풀어본 종수,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종수의 시험점수를 올리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쏟다가 화를 내게 된 선정이의 스토리에 나는 엄마가 아니라 동화 속 선정이가 되어 몰입했다.


어느 순간 훅 다가온 사랑을 경험한 아이들. 엄마 아빠가 아닌 우주에 다른 한 사람에게 받은 사랑과 설렘. 그들의 이야기는 그 사랑을 지키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진형민 작가의 동화다웠다. 아이돌 외모급 배우들이 펼치는 설렘 포인트에 열광하다 끝나는 영상이 아니라 첫사랑의 느낌을 살리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질문을 남겼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1교시 사귀기로 했다가 6교시에 헤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학교에서 학부모를 위한 성교육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강사분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아이들이 오늘 사귀었다가 내일 헤어졌다는 말을 쉽게 한다고 말이다. 누가 누구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말도 쉽게 놀림거리가 된다고 했다.


“엄마 있잖아. 승원이가 세희한테 고백했는데 차였대. 크크크.”

“아이고. 승원이가 얼마나 멋진데. 그런데 말이야. 엄마는 누가 누구를 찼다는 말이 좀 그렇더라. 사람이 공도 아니고.”

“우리 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럼 뭐라고 말해?”

“고백했는데 거절했다고 해도 되고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고 해도 되잖어. 고백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네가 한다고 생각해 봐. 고백받은 사람이 상대를 존중한다면 함부로 떠벌리지 않고, 찼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좋을 거 같아.”


내 말을 듣는 건지 아닌 건지 아이는 금세 자리를 떠났지만 아이들이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말을 썼으면 하는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내 아들 딸이라도 뛰는 가슴까지 내가 관여할 수는 없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누리고, 배워보길 바란다. 엄마아빠들이 걱정하는 문제는 현실적인 성교육이 필요할 테고, 다만 세상의 많은 아들 딸들이 먼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니면 좋겠다.




“엄마, 오늘 태권도에서 어떤 남자애가 그동안 왜 안 나왔냐고 여행 갔었냐고 묻더라.”

“그랬어? 친절한 남자애네.”

“응. 오늘 고려 품새도 잘 알려주더라니까. 나 이제부터 7시부 가야겠어.”


청룡 영화제 영상에 빠져 ‘어머’를 연발하던 나는 갑자기 귀가 트였다.

“너 다음 달부터 태권도 그만두겠다고 안 했어?”

엄마의 직감이 왔다.


“엄마, 그만 좀 봐. 그게 뭐가 멋있다는 거야. 나 참.”

‘딸,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저 그윽한 눈빛 하며 살짝 잡아주는 손놀림 어쩔 거야.’


그나저나 이제 동영상은 그만 보고 아무래도 내일은 선글라스를 끼고 태권도장 앞에 서 있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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