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어디서든 배우려는 태도겠다. 여기서 배우려는 태도란 결과를 담보로 하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를 일컫는다. 직접 겪지 않은 역사에서 배우고, 만나는 사람에게서 배우고, 벌어지는 상황에서 배우고, 눈치껏 분위기로 배우고…. 배우는 일은 늘 칭찬받았고 내 위치를 늘 학생으로 두게 만들었다. 바꿔 말하면, 늘 칭찬을 갈구했고 늘 선생을 찾아다녔다는 의미다.
앉은 자리 왼쪽 벽에는 얼마 전 질질 울며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글이 있다. 한글 24포인트로, ‘실패에서 배워요’. 그리고 10포인트로, ‘실패도 팔 수 있는 시대! 에피소드 수집 굳b’. 배움은 언제고 괜찮고 그 과정 자체를 빛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마약 같은 면이 있다. 언제쯤 다 배울 건지, 배운 걸 어떻게 써먹을 건지는 크게 생각지 않아도 된다. 모든 걸 유예하고 그걸 용인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아마 배운다는 말에는 성장이 담보돼있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다고 자위하기 딱 좋기 때문이겠지.
애초 이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실패담이 지금 내 발판이 되었을 거라고, 내 리즈 시절은 어쩔 수 없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지금도 그렇게 해석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불현듯 딴생각이 들었다.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면 어때?
아니, 질문이 잘못됐다.
애초에 실패는 배우라고 찾아오는 문제가 아니지 않아?
그건 사고지. 그저 사고를 잘 수습하기 위해 배운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거지.
정말 실패에서 배웠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실패 없이 살아야지 않겠어?
그런 점에서 실패는 필연적으로 나를 포함한 인명 사고일 테다.
필연적으로,
나를,
포함한.
사회를 예로 들어보자. 인명 사고가 벌어지면 당한 사람과 수습하는 사람, 치료하는 사람, 부당함을 들어 항의하는 사람, 이론으로 분석하는 사람, 정책으로 사고를 방지하는 사람 등으로 역할이 세세하게 나뉜다. 당연히 사고 한 번으로 원스톱 진행될 리는 없다. 어떤 때는 사고 한 번, 또 어떤 때는 사고가 수십, 수백 번이 누적돼야 진행되기도 한다.
개인의 실패인 인명 사고는 어떨까. 배운다는 행위는 이론으로 분석하는 사람이 취하는 거겠다. 그렇다면 수습하는 사람은? 치료하는 사람은? 부당함을 들어 항의하는 사람은? 사고당한 나를 분석하는 나로 치환하려면 목격한 것들, 겪은 감정들, 잡히지 않는 상념들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론에는 내가 빠져있다. 그때의 사고는, 실패는, 숱한 경우 중 하나의 예시일 뿐.
나는 관조자로서 분석하고 성찰하는 것으로 사고마다 빠져나왔다. 하지만 사고는 해마다 벌어지고(어쩌면 월마다) 배운 걸 반복하며 살기도 한다. 실패는 거듭되는데 성장은 나날이 더디고, 나아진다는 감각보다는 갉아 먹는다는 감각이 더 살아 활개 친다. 어제보다 오늘 더 고되고, 어제 겨우 닦은 눈물을 오늘 두 배로 흘리기도 한다. 아무리 조심스레 발을 내디뎌도 돌 모양의 웅덩이를 피하지 못하고, 때로는 그 웅덩이가 늪이라서 나를 잠식하기도 한다. 실패란 그렇다.
이제 말할 실패담들은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실패부터, 꽤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실패까지 아우른다. 나를 얼마나 빈약하게 만들고 어떤 옹졸함이 고개를 치켜들었는지 낱낱이 살펴볼 셈이다. 그 안에는 지금으로서는 용서가 안 되는 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미리 구차하게 변명하자면, 그때는 그 길밖에 없었을 거다. 시야가 좁아서건, 정말 선택지가 그것뿐이건.
그러니, 인류애 박살 주의!
지금의 내가 과거와 꽤 다를 수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제목이 <오프닝 실패>인 건
10여일을 써야지, 생각하고 이제야 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