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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May 19. 2022

(Ummm) 실패담 1 : 손톱 깎기 실패




나는 손톱 바디(손톱 전체)가 큰 편이다. 그러면서도 손끝 살과 손톱 끝부분이 거의 비슷해서 조금만 손톱이 길어도 불편해지곤 한다. 나만의 기준이라면 가볍게 주먹 쥐었을 때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드는가로 깎을지 말지 결정하는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손톱만큼은 정직하게 자란다는 걸 안 것도 그즈음이다.


한 번은 아르바이트 목적으로 네일 모델에 지원했는데 내 손톱 상태를 보더니 바디 크기도 적당하고 모양이 예쁘지만, 손톱이 너무 짧아서 작업하기 어렵겠다는 말을 들었다. 아트를 구현하기에 면적이 좁은 것보다 넓은 게 아무렴 편할 테니 쉽게 수긍했다. 또 네일샵에 가지 않고 매니큐어를 직접 바를 때면 손톱이 원체 짧아서 손끝에 꼭 묻어났으므로 아세톤 묻힌 면봉으로 그걸 닦아내는 일이 매번 뒤따랐다. 자연에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더하는 일은 성가시다는 걸 자주 짚었다.




내가 그렇듯 당시 또래 여성들은 네일아트를 위해 일부러 손톱을 기르기 일쑤였지만, 손끝을 넘어서는 손톱을 감당하는 일이 내게는 버거웠다. 부러 주먹을 꽉 쥐지 않아도 자연스레 움켜쥘 때면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월에 최소 두 번은 깎아야 했으니 제법 귀찮은 일이었다. 그게 다 길게 자라난 탓이었다. 과도하게 길게.


사실 손톱이 길면 생활하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손톱이 뒤집힐까 두려워 캔 마개를 거침없이 딸 수 없고, 무언가를 집을 때도 조금 더 조심해야 한다. 손톱이 그 물건을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간지러운 곳을 긁을 때 생채기를 내거나 가끔 피를 보는 것은 물론, 심하면 어딘가에 걸려 손톱이 들리는 경우도 생긴다. 자판이나 액정을 누를 때면 마찰하는 소리가 날카로워지는 일도 그렇다.


가장 큰 건 무뎠던 손톱이 일종의 칼날처럼 변하는 과정이 싫은 데 기인한다. 쓸모를 다할 뿐 무해하던 손톱이 나를, 타인을 해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손톱을 깎았다.




어릴 때는 손톱이 길쭉하고 예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비단 손톱에만 국한되는 말은 아니었다. 손가락이 쭉쭉 뻗어 피아노 치기 제격이라는 말을 집에서나 밖에서나 칭찬처럼 들었다. 뭐, 그때는 몰랐지.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손가락이 하는 일이란 고작 자판을 치는 것에 국한된다는 걸. 아무튼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손은, 손톱만큼은 타고났다고 여기며 깨나 자랑스러워했다. 과거에만 머무른 게 아니라 현재까지도 그 마음은 이어지고 있다. 부족함 투성이인 몸뚱어리에서 그나마 내세울 게 그 정도라는 생각도 늘 덧붙는다.


짧은 손톱을 유지하는 동안 터득한 부분은 살을 베지 않게 바투 깎는 법이겠다. 손끝 살을 조금 넘어서는 정도로 깎되, 금방 자라서 애매해지지 않을 길이로 정리하기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하얗게 오른 손톱 끝을 깎아내는 일인데 욕심을 내면 살 안쪽까지 잘라버려서 따끔거리기에 십상이다. 그 오묘한 지점을 기억하고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일이 바로 손톱 깎기란 말씀.


네일샵에 가면 손톱깎이를 사용하지 않고 파일로 갈아서 길이를 조절하는데 난 그게 답답하기도 하고 가루가 흩날리는 것도 영 불편한데다 모양을 잡기도 퍽 힘들어서 손톱깎이와 버퍼를 같이 쓴다. 사포처럼 된 파일과 달리 버퍼는 거친 손톱 표면을 다듬어주는 역할을 하기에 투박하게 잘린 단면을 매끄럽게 정리하기 쉽다. 주로 쓰는 건 6단계로 나뉜 버퍼로, 2단계와 4~5단계를 1, 2차로 나눠 애용하는 편이다. 글로 설명하면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듯 보이지만 몸에 익어서 전 과정이 짧게는 5분, 길어도 10분을 채 넘지 않는다. 그만큼 간단한 일이다.




이렇게 말하니 3n 년 인생에 손톱 깎기에 통달한 듯 보이려나. 그렇다면 실패담에 이 주제가 들어올 리 없을 터. 최근 들어 잘라내야 할 지점을 가늠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정확히는 손톱을 깎은 뒤 며칠간은 자판을 치거나 손톱으로 무언가를 뜯어내야 할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따끔거려서 자주 들여다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인이 뭔지 돌이켜보면 하나다. 과하게 많이 잘라낸 탓.


어쩌면 미세하게 더 잘라낸 만큼 천천히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급함. 그 마음이 며칠간은 손가락을 놀릴 때마다 찌릿한 감각으로 자리하고, 역설적으로 손톱이 얼른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낳는다. 그러는 동안 일정한 속도로 자라나는 자연스러움에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태도를 배운다. ‘조금 더’와 ‘조금 덜’ 사이를 오가면서 말이다.




생명이 있다면, 에너지가 있다면 생장할 테고 그 변화가 내게 이롭다면 생각할 필요도,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생장이란 번거로운 일이고 끊임없이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기에 나는 손톱 깎는 길이의 애매함을 매 순간 결과적으로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자라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자라난 무언가를 적당한 시기에 정돈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내게 손톱 깎는 과정은 아직 살아있다는 방증이기도, 여전히 잘라낼 부분이 존재한다는 각성이기도 하다. 손톱이 과하게 잘려 나갔을 때는 더 들여다보고, 알맞게 잘렸을 때는 에너지를 다른 데 더 쓰면서 매일을 보낸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손끝이, 손톱이 하는 일은 예상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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