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주니어 디자이너의 IT 스타트업 공동창업기
스타트업에서 퇴사한 채 창업 로그를 작성하려니 감회가 새롭다. 그동안 브런치를 통해 선각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은 만큼, 나의 경험도 그만한 가치가 되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다. 졸업 과제, 졸전 위원회, 창업을 동시에 다루다 보니 꾸준하지는 못해도 가끔씩 글을 써두었는데, 비로소 퇴사한 작금에야 어우러지게 엮어 볼 기회가 온 것 같다.
비록 학교를 갓 졸업한 디자이너가 겪었던 좌충우돌 항해기이더라도 가끔씩 발견하고 쉬다 가는 무인도처럼 누군가에게는 작은 힘이 될 수 있길 바라며, 기억과 문장을 다듬어본다.
학생 창업일 경우 스타트업에 발을 들이는 과정은 대개 교내외 공모전, 창업지원 프로그램, 창업지원형 학기제와 같은 시스템 속에서 피어난다. 요즘의 대학에서는 학생 창업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정말 많기에 다양한 혜택을 받기 위해서라도 과제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창업 아이템으로 발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시스템이 아니라면 주니어 디자이너가 처음 외주를 시작하게 되는 경로처럼 지인을 통해 자리를 얻게 된다던가, 학과 내 동아리, 선배의 추천 등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식이다.
나는 후자의 경우였고, 스타트업 공동창업자로 재직하게 된 경위에 아주 거대한 명분이나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2020년 6월 질풍노도의 졸업예정 디자인 4학년에게 우연한 기회가 닿아 시작됐다. 몸 담고 있는 교내 IT 동아리에서 주식 SNS 앱을 제작하는 학생 창업 팀이 결성 중에 있다는 소식과, 해당 팀이 공동 창업자이자 디자이너를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동아리 카톡방에 올라온 공지 글을 보자마자 번뇌에 빠졌다. 짧게 소개된 아이템에 관해서는 호불호가 없었으나 졸업을 하기도 전에 창업을 시도해보리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학사모를 쓰게 될 여느 학생들처럼 포트폴리오를 다듬으며 어떤 기업에 인턴이나 신입 이력서를 써야 할지, 나를 받아주는 곳은 있을지 한참 괴로워하던 시절이었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시간은 흘렀고 카톡방에 올라온 기회가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제출했다. 결과를 기다리며 혹시나 떨어질까 하는 초초함에 신포도를 떠올리는 여우처럼 창업은 무모한 짓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 막 졸업하게 될 나이인데 도전하기에는 너무 고학번이지 않냐며. 지금 생각하면 못난 계륵 마인드지만, 그 당시에는 학교라는 튼튼한 안전망의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나름 심각했던거같다.
이때 생각을 바꿔 지원을 결정케한 건 내가 아니라 Surfit 팀의 Ami님이었다. 학교 프로젝트를 통해 알게 된 현직 디자이너셨는데, 학부생 시절 스타트업을 하며 성장해온 이력이 있다고 말씀하신 게 떠올라 조언을 구한 것이다.
+
지금 생각해보면 Ami님 덕분에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만큼 너무나도 감사한 반면, 너무 대뜸 고민을 여쭌 게 아닌지 죄송스럽기도 하다.....) 여러 미욱한 고민들을 여기에 공유하기가 부끄러워 짧게나마 언급하지만, 정말 큰 힘이 되어주셨다.
많이 얘기해보고 충분히 내가 들어가서 시너지가 나겠다고 하면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나중에 혹시나 여기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때는 과감하게 그만둬도 괜찮아요. 혜림님 스스로가 무엇보다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준비가 되었다면 언제든지 시도해보라 응원하며 덧붙여주신 마지막 문장이 인상에 남았다. 도망치면 C+을 받는 학교가 아니니, 영 아닌 거 같으면 박차고 나오는 선택지도 있다. 살아가며 이 문장을 이따금씩 잊어버린 때도 있고 마음처럼 쉽게 따르진 못했지만 스스로를 지킬 무기로서 심저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나에게 비슷한 조언을 구하는 후배가 있다면 기꺼이 이 말을 전해주고 싶을 만큼, 앞서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말을 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가장 중요한 건 나다! 당시의 나는 후회하지 않을 만큼 '내' 아이템으로 몰입할 확신이 있었으니, 두려움을 무시하고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일찍이 결성된 멤버로부터 합류 의사를 확인하게 되었다. 어제의 긴장과 걱정이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창업 경력이 있는 대표의 조치로 초기 팀의 의사 결정 과정이 다소 편향적으로 진행되어버린 감이 있지만, 그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작년 초 여름 청계천 근처의 공공 스페이스에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도원결의가 성사됐다.
어쩌면 창업을 하기에 너무 가볍게 시작한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가벼운 계기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얼마나 책임감을 삼키고자 하는가가 문제였다.
흔히 스타트업에 입사하게 되면 팀 내 수평적인 문화, 탄력 근무제, 새로운 아이디어에 관한 열린 마음, 실험적인 워크 프로세스 도입, 직접 제작하는 프로덕트에 관한 애정, 발 빠르게 부딪히고 움직이며 빠르게 성장할 가능성 등, 중소기업 내지 대기업에서는 쉽게 찾기 힘든 환경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업무 환경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처음 창업 팀에 들어간 당시에도 위의 문화를 언젠간 누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쁜 마음이 있었다. '스타트업 밋업도 개최하고, 흥미 많았던 개발도 배우며 교류하고, 워크숍도 다녀오면 정말 좋겠다. 그걸 내가 조율하고 관리하게 될 수가 있겠구나.' 좋다. 하지만 우리는 저 좋은 환경을 누린다기보다 긍정적인 코어를 가진 인프라부터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입장임이 분명했다.
당연하지만 결국 저 코어를 누리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3년? 5년? 알수없다. 수평적 문화, 열린 마음, 실험 정신, 프로덕트에 관한 애정 모두 팀에 들어오게 되면 각자의 마음속에 공평히 자연 발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약속'을 해야만 일종의 증여 간 계약처럼 발생한다. '팀은 Data로 판단하여 빠르게 움직입니다.'라고 모두가 완벽에 가깝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은 무엇일까? 바로 경험이다.
'내가 예전에 ~방식으로 일해봤는데, 업무 효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어. 그래서 일부 취사선택해서 우리 팀에 적용해보면 좋지 않을까.'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기업의 문화가 궁금했는데, 한 달간 적용해보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우리 문화로 편입시켜보자.'
하는 식이다. 하지만, 학부생 3~4학년으로 구성된 그룹은 인턴이나 짧은 경력으로 몸담았던 회사의 유익한 업무 프로세스까지 완벽히 체득한 존재가 아니다. 결국 짬짬이 당근마켓, 강남언니, 토스, 마이리얼트립 같은 쟁쟁한 스타트업의 블로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우리는 장인의 솜씨를 어깨너머로 배우듯 다른 기업의 블로그를 참고하며 사업 초기부터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자 했다. 러프하게 짜낸 Work 101은 지금 보아도 양호한 편에 속하지만, 멤버들과 함께 충분히 피드백을 듣고 수정하며 완벽히 우리만의 것을 만들지는 못했다는 게 아쉽다. 첫 술에 만족하기는 쉽지 않다만 팀을 창조하기 위한 각자의 역할과 선언의 무게를 깨닫기 까지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욱 대화하고, 토론했어야 했다.
첫 단추를 여미며 개발과 기획에 불을 붙였다. 학교의 창업팀을 위해 마련된 사무실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었는데, 거기다 보드마카로 와이어프레임을 그리며 열띤 토론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안드로이드, IOS 버전 모두 개발을 진행하기 위해 개발자도 고생하고, 모두가 학업과 일을 동시에 해치우며 철야를 하던 때였다. 그리고 팀은 이내 장애물을 맞이했다.
사무실은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는가.
사무실과 워크 툴을 (Notion, Figma, Google Suite 등) 결제할 초기 비용은 어디서 마련하는가.
모두 학생 신분이고, 졸업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 등 빠듯한 일정을 가진 멤버가 많은데 어떻게 사업의 효율을 높이는가.
서비스 제작 단계에서 멤버가 각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데이터 분석과 유저 경험 리서치, 스토리보드를 고민하는 UI/UX 디자인 업무도 중요했지만 위는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보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제반사항이 쌓여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은 집에 딸린 차고나 식탁에서 모여 개발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단독 주택에 딸린 차고도, 5명이서 함께 둘러앉을 식탁도 없었다.
학생들의 창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정부와 학교의 프로그램이 있음에도 지원서에 작성할 내용부터 만들 배경이 필요했고, 실질적으로 학생 창업팀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온전히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Q. 사무실은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는가.
A. 서울의 땅과 건물 값은 천정부지로 높다. 월세로 자취방을 얻어 사는 우리에게는 최소 월 160만 원이 따박따박 나가는 사무실을 임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팀 결성 직후 한 달가량 교내 공용공간을 거처로 삼았다. 하지만 매일 티켓팅을 하는 것처럼 예약을 해야 한다거나 오후 5시만 되면 나가야 하는 등, 학교 시설 특성상 이용 시간의 제약이 있어 원활한 업무가 불가능했다.
결국 미봉책으로나마 멤버 각자 사비를 걷어 서울역 뒤편의 낡은 주택에 단기 임대로 들어가게 됐다. 코어타임만큼은 다섯 명이 함께 자취하는 것처럼 생활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업계가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에어비앤비임에도 한 달 주거식 임대가 가능했던 부분도 있다.
Q. 사무실과 워크 툴을 (Notion, Figma, Google Suite 등) 결제할 초기 비용은 어디서 마련하는가.
A. 워크 툴을 결제할 초기 비용은 한동안 대표의 사비로 충당했다. 학생 계정으로 등록하면 할인이 되는 서비스도 더러 있었지만 접근할 수 있는 기능에 한계가 있는 만큼 가장 기본이 되는 멤버십으로 결제했다. 그 당시는 고정적으로 나가는 서버 비조차 없는 초기 단계여서 월 지출이 크지 않았다. 창업을 시작한 지 2~3개월 만에 한국벤처투자협회로부터 엔젤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고, 그 후부터는 법인 자격으로 안정적이게 결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연말쯤에는 서버 비만해도 월 100만 원이 나가게 되리라고는.
Q. 모두 학생 신분이고, 졸업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 등 빠듯한 일정을 가진 멤버가 많은데 어떻게 사업의 효율을 높이는가.
A. 시험공부와 과제가 가득한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해하되, 창업을 위해 모인 팀인 만큼 학업으로 인한 업무 시간 방해가 클 경우 휴학을 선택하기도 했다. 또한 탄력 근무제를 통해 9 to 6가 아닌 11 to 5 코어타임과 잉여시간 리모트 룰을 설정하고 이 시간 동안 꼭 함께 근무할 것을 약속했다. 특히, 나는 졸업전시에 올릴 두 가지 프로젝트와 졸업전시위원회, 과 대표 업무까지 처리하려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다. 거기다 턱 밑까지 올라온 기획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UX 리서치, 데이터 분석, 프로타이핑을 밤새워 공부해야 했으니 말 그대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물론 다 같은 입장으로 몸을 바쳐가는 것이니 감수했다.
Q. 서비스 제작 단계에서 멤버가 각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A. 이 고민은 앞선 문제와는 달리 잠깐의 방황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다양한 방향으로 스스로 공부하고 팀에 적용시키기를 반복하며 각자 역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 노력해야 했다. 모두가 함께 기획을 하다 보니 결정권자의 존재가 필요해 PM 체제를 들이기도 해 보고, 기획 담당 멤버 둘이서 돌아가며 PM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각 멤버별 경력의 위계가 없고, '이제부터 당신이 PM이야'라고 해도 바로 팀 내에 적용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약 6개월간 결정권자의 파워는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모두 다 같은 주니어의 입장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나 싶다.
* 다음 기회에 서비스의 발전 단계별 각 멤버의 역할에 관해서 정리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서문에서 일러두었던 것처럼 지금은 작년 6월부터 몸담았던 팀에서 나온 상태이다. 1년만 채우겠다고 하는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3년까지도 장래를 그렸던 서비스이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조금은 이르게 결정됐다. 입사 후로도 다른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나서 스타트업에 가보는 게 좋지 않았겠냐는 걱정과, 연이 닿았던 디자이너분들과 함께 일하지 않겠냐는 감사한 제안을 몇 번 받았지만 '내' 프로덕트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경험을 높게 샀기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았다. 다만, Ami님이 앞서 이야기해 주신 것처럼 그만둘 때가 됐기에 과감히 그만두었다. 그동안 다양한 경험치를 축적한 상태로, 다시 작년의 여름날처럼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리고 만일 다시 스타트업 씬에 들어갈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Yes다.
대개 신입 및 1년 내외의 주니어 디자이너가 선택할 수 있는 회사는 사수가 함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스타트업과 창업을 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 오히려 가르쳐주지 않아 스스로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깨우쳤고, 프로덕트에 대한 책임을 여실히 느끼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모든 시간들이 나의 뼈와 피와 살이 되었다. 게다가 개발자와 기획자 사이에서 직접 소통하거나 의사를 전달하며 각 영억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공부를 했더니 어느샌가 기/디/개를 다 할 줄 아는 제너럴레이터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 팀 운영 역까지 맡아보니 'C'나 'O'의 자리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잡탕이 아닌 풀스택 디자이너라고 해주자.) 더할 나위 없이 Yes다.
+
다음화에는 조금 더 현실적인 팁이 될 수 있는 창업자와 공동창업자 간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 보면 좋을 것 같다. 한국은 특히 '공동창업자'임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근로계약서, 주주간계약서 등 서류적인 측면을 다루게 되지 않을까. 한국의 모든 학생 창업팀이 연속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