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생각과 흩어지는 체계를 문서로 정리해야 할 이유
창업을 경험하며 예상치 못했던 건 어느새 사내에 공유되는 문서 대부분의 작성과 관리를 본인이 맡게 됐다는 점이었다. 다양한 장르의 테스크를 커버하느라 손이 부족하지만 절실한 사람이 일을 안게 되는 구조라 하였나, 체계가 부재한 나날이 괴로워 문서 정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게 끝을 보게 만들었다.
이 글은 전 직장에서 '공유하기 위한 글'을 작성했던 경험으로, 체계가 정립되지 않아 혼란할 초기 스타트업 팀에게 유효한 조언이 되길 바라며 작성하였다.
이 글이 도움 될 수 있을 분들
○ 시스템과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스타트업과 팀
○ 글쓰기가 막막한 창업팀 멤버
○ 노션 용례가 궁금한 분들
이따금 스타트업 전용 관용구인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고 있노라면 무질서와 혼돈을 좋게 포장한 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흡수와 융합이 빠른 창업팀 특성상 이런저런 기업의 특성이 짜깁기된 문화로 인해 정체성이 모호할 때가 많기 때문이리라. 또, 일 잘하는 문화에 그 누구보다 관심이 많지만 도입 이후 객관화가 부족한 집단이 많다. 회사에 흐르는 모호함은 팀과 개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불분명한 업무 구분, 책임 소지, 소통이 그렇다. 이는 잡플래닛을 뒤덮은, 회사에 대한 악평의 한 가지 유형이기도 하다.
때문에 초기 창업팀이거나 지속 가능한 문화를 만들어내고 싶은 집단이라면 대표나 멤버가 스스로와 동료에게 줄 '공유를 위한 문서'를 작성해볼 것을 권한다. 멤버 사이에 공유되기 위한 글은 그 자체로 시스템이 되며, 문장을 이루는 단어와 열심히 고민한 문단 구조에서 오는 분위기는 회사의 정신을 만든다. 글은 그 자체로 체계의 꽃이다.
일의 연장에 있는 문서는 글과 유대가 없는 사람들도 쓸 수 있는 효율적인 문서이기 때문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 화려한 글 쓰기 능력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어떤 종류의 글이던지 각 직군과 포지션을 막론하고 쉽게 읽히도록 작성하고, 문서를 토대로 대화할 수 있도록 스스로 배경이 되면 충분하다. 이때 글은 아카이빙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에세이가 되기도 하고, 광고 글이 되는 등 사용처, 목적에 따라 그 종류가 많겠지만 '읽기 쉽고 공감하는' 글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본질적으로 같은 목적의 소재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우선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소재가 필요하다. 다행히 스타트업은 널린 게 소재다. 조직 운영을 위해 암묵적으로 동의한 R&R을 문서로 가시화시킬 수도 있고, Onboarding Process (팀 합류 프로세스)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입사자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혹은 회사를 설립하는 과정에 대표와 공동 창업자들이 모여서 법인을 세웠던 경험, MVP 서비스를 제작하기까지의 여정, 출시 후 첫 피드백에 관한 글, User Retention을 높이기 위해 Data를 공부하고 User Tracking에 쏟아부은 노력처럼 서사가 담긴 문서를 쓰고 세상에 공유할 수도 있다. 때로는 기술 블로그를 통해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사례도 있다. 사업이 성장하며 사람, 일, 돈에 관한 이야기도 늘어나기 때문에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내가 집중했던 포인트는 '나도 궁금하고, 멤버들도 궁금해할 점부터 글로 정리하자.'였고, 직접 작성했던 문서를 기억나는 대로 용처에 따라 나누자면 다음과 같다.
*아래의 문서의 전체 내용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1) 사규/내규 정리를 정리한 문서
초기 창업팀이거나 사이드 프로젝트 팀이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RnR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책임과 권한의 영역에 대해 매 번 서로 다른 이해로 인해 피곤해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각 멤버가 동일한 수준의 이해를 갖고 있는지 묻기 위해 각 포지션 별 업무를 정리하거나, 회의의 규칙을 정리한 문서를 작성하고 공유했다.
2) 문화/복지 정리 문서
대표, C레벨이 아닌 멤버가 작성하는 글은 회사를 향한 제안서가 되기도 한다. 정말 수평적인 문화라면 많은 멤버의 공감과 피드백을 받은 제안서쯤은 쉬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채 묵혀져가던 문화/복지를 짚고 넘어가기위한 문서를 작성했다.
이의 배경을 잠깐 설명하자면, 1년 간 함께했던 팀은 성장이 빠른 편이었지만 이렇다 할 수익구조가 없어 매출액은 한 푼도 나오지 않았던 상태였다. 투자금도 인건비를 제외한 고정 지출에 소진되었다. 사실상 4~5명, 때로는 6명의 인원이 정당한 보상(임금) 없이 최소 6개월부터 1년 넘도록 매일 8시간을 바쳐왔다. 매 월 빠듯한 한 달치 식대만 나오는 정도. C레벨로서 이 문장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라고 느껴진다면 창업은 다시 생각해보자. 탄탄한 수익구조 없이 사람만 갈아버리는 건 시간과 명성을 쓰레기통에 골인시키는 짓이다. 헌신과 사랑이 아니고서야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원은 보상이다. 오로지 프로덕트에 관한 관심으로 뭉친 팀이었기에 다른 보상이라도 제공해야만 했다. 이에 최소한 이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복지, 예를 들어 교육비 지원 이나 휴가/연차에 관해 대표와 이야기를 나눈 후 글을 쓰고, 다른 멤버들의 피드백을 받아 기초를 다졌다. (아쉽게도 대표와 각 멤버가 생각하는 복지의 범위에 괴리가 있어 수정을 거듭하다 완성 시키지는 못했다.)
3) Welcome 문서 (팀 합류 및 세팅 절차 안내 문서)
두 번째 글에서 짧게 언급한 것처럼, 팀은 인원이 수시로 변화하였다. 적게는 4명, 많게는 6명.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는 팀이기도 하고, 시스템과 보상이 부족하여 안정적인 인원 유지는 어려운 만큼 공동 창업자를 제외하면 입사와 퇴사가 잦은 편이었다.
그만큼 새로운 개발자 멤버가 들어올 때마다 개발 환경을 세팅하기 위해 기존 멤버가 붙어서 하루 종일 도와야 했다. 이 외에도 Slack, Notion, Google Suite, Git hub, GA, Jira(Atlassian) 등 연동해야 하는 등 절차가 많았는데 이런 합류 과정을 전담, 관장하는 포지션이 없었기에 하루는 한 명씩 붙어서 알려드려야만 했다. 만일 새로 들어오신 분이 개발자다? 일주일 동안 개발환경 세팅하느라 머리를 쥐어뜯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이때 한 개발 파트 입사자가 스스로 겪었던 합류 과정, 개발 환경 세팅 방법을 정리한 초고를 공유해 주었고, 이를 토대로 회사 문화 및 정책, 상호 소개 등을 첨부하여 문서를 완성시켰다. 체계를 주창하는 내가 신규 입사자의 시야를 고려하지 못했던 점이 부끄러웠지만 그분 덕분에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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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2021 Toss Simplicity에서 강영화 Product Designer님이 100여 개가 넘는 Tool에 권한을 요청하거나 계정을 만들어 내는 일마저도 자동화시켰던 일화를 소개해 주셨는데 함께 일하는 사람의 UX마저 개선해버리는 섬세함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대외 공개 자료의 글은 마케팅과 닮았다. 서비스의 홍보 차원이기도 하고, 투자자를 향한 세레나데이기도 하다. 서비스가 지향하는 목적, 언론에서 언급하는 서비스, 팀 문화에 대한 짧고 굵은 글로 작성되는데 여태 작성한 글 중에서 가장 비즈니스적 책임이 막중한 글쓰기였던 것 같다. (내가 혼자 이런 것 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현타가 가장 크게 들었던 문서이기도 하다.)
1) 서비스 소개 페이지
서비스 랜딩 페이지는 노션으로 작성되어 링크로 공유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도메인을 파서 운영될 수도 있다. 우리 팀의 경우 투자 유치를 위해 팀, 서비스를 좀 더 투자자 관점으로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노션으로 상세히 작성한 편이었다. 서비스의 탄생 배경부터 서비스를 바로 이용해 볼 수 있는 링크와, 투자 시리즈에 관한 작은 단서를 제공하는 정도로 작성됐다.
2) 리크루팅 페이지
노션이나 잡코리아, 원티드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리크루팅 페이지이다. 개인적으로 실제 서비스 화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찾고, 많이 보는 페이지가 리크루팅 페이지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 역할이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입사 지원자는 뒤 돌면 고객이다. 때문에 리크루팅 페이지는 '가고 싶은', '붙지 않더라도 쓰고 싶은' 회사의 면모를 끌어내는 인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대외적으로 공개되는 모든 글은 마케팅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입사 지원자의 입장이 되니 리크루팅 페이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 보더라도 지원을 삼가고 싶은 회사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개인적으로 잘 작성됐다고 생각하는 리크루팅 페이지는 아래 예시로 달아두었다.
우리 팀의 경우 개발자 포지션만 채용 중이었기에 지원 역량, 기술 스택, 원하는 인재상 등에 관한 것들로 구성됐다. 본인은 인사 파트에 인원이 필요할 때만 지원하는 형식이었기에 크게 관여하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 리크루팅 페이지가 구성됐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지원자가 이력서를 제출하고 싶도록 USP(User Selling Point)를 충분히 녹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공고가 진행됨에 따라 아래 링크는 언제든지 삭제되거나 비공개 처리될 수 있다.
https://www.notion.so/UI-UX-eb9665e1c0a34f63b4e8ea3682e9eae8
1) 회의 자료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그러하겠지만 애자일 하게 굴러가는 회사의 회의는 종류가 다양하다. 스크럼 미팅, 스프린트 회고, 전사 회의, 기획-디자인/디자인-개발 미팅 등. 이의 Background이자 결실이 되는 회의 자료는 대개 중요 논점, 안건, 결과만 심플하게 정리해서 작성하기 때문에 가장 포맷이 간단한 편이다. 잘 정리된 회의록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Roadmap이 틀어지지 않도록 조타를 잡아주는 역할도 한다.
회의록은 '회의록을 작성하는 행위가 흐지부지 되지 않을 정도'의 분량과 템플릿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회의의 목적과 사업 방향성에 따라 템플릿은 무궁무진하게 형태를 달리하니 예시는 따로 만들지 않겠다. 대신, 아래에 한 회차의 전사회의록 목차를 첨부했다. 내 경우엔 캐주얼 미팅(30 min - 1h)은 카테고리와 리스트로 분류/정리하고, 전사 회의는 아래와 같이 서술형의 구조로 작성하여 먼 미래에 다시 보더라도 흐름과 분위기가 떠오르도록, 읽기 쉽도록 만들었다.
2) 팀 블로그
위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팀 블로그는 브랜드를 알릴 좋은 채널이다. 특히 개발과 디자인 분야에서 효과가 유별난데, 모든 회사가 어려워하는 낯선 기술이나 문제 해결 과정을 문제 인식부터 해결의 과정까지(중요) 정리해서 공유한다면 메시아의 기록, 선각자의 노트, n0년간 선임이 후임에게 물려준다는 군사 수첩처럼 대대로 소중하게 전해진다.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은 문제를 겪고 있기에...!
하지만 팀 블로그는 멤버 한 명이 커버할 수 있는 글쓰기는 아니다. 우리 팀의 경우에도 시도는 했지만 실행은 하지 못했다. 멤버가 돌아가면서 주기적으로 글을 써서 특정 채널에 발행해야 하는데 인원이 적어 한 사람 당 업무량이 많은 조직이라면 글까지 써달라고 부탁하기가 미안하다. 그래서 블로그는 사내 공유를 위한 문서를 다 정리한 이후로 '필요하다면' 작성해보는 것도 좋다. 멤버 스스로가 경험을 정리하는 데에 가치를 느껴야 가능한 일인 만큼 강제성이 부과된다면 반향이 일어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창업팀 문서 작성에 관한 나의 경험이었다.
'생각을 글로 구조화하고 공유해보세요. 사람들의 생각은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아요.'
주니어 레벨의 또래 디자이너를 만나거나, 비슷한 규모의 창업팀을 만나서 늘 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글쓰기에 그만한 가치를 둘 필요가 있는지 고민하는 얼굴을 비추기도 한다. 설득이 되거나 되지 않고는 밖의 영역이지만 가능하면 최대 다수의 사람들을 글을 쓰자고 권유하고 싶다. 많은 창업팀이 그들의 정신과 의지, 작게는 마일스톤을 멤버들과 효과적으로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길, 그리고 그 토대를 스스로 쌓아보는 경험을 해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