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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Apr 03. 2024

노견 돌보기

살고 쓰다

지난달 21에 <삼체>가 공개되자마자 밤을 새워서 정주행하여 보고 나서 삶에 변화가 생겼다. 내가 잘 시간에 자지 않고 서재방에서 틀어박혀 있으니 노견이 시간 감각을 잃어 버렸던 것이다. 


환하게 조명이 밝혀진 서재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던 노견은 새벽이 되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더니 소변을 보고, 문이 아니라 벽을 향해 걷다가 벽에 부딪히자 물건들 사이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내 서재는 거의 창고와 같아서 온갖 물건이 방치된 미로와 같다.). 꺼내놓으면 다시 이상한 방향으로 갔다. 


마음대로 화장실을 오가라고 문을 활짝 열어두고 영화를 봤는데, 새벽에 아이들 아침거리를 준비해 두려고 서재를 나오자 서재 안에서 일어난 일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집 안 곳곳에 개오줌 자국이 즐비했다. 


내 개는 올해 열일곱 살(로 추정되는 나이)인데, 사람으로 치면 팔순쯤 될 것 같다. 백내장이 와서 눈이 거의 멀었고, 큰소리를 쳐야 제 이름을 알아들을 정도로 귀도 멀었고, 걷는 모습에서 '아, 관절염이 왔구나' 싶은 느낌이 들지만, 대체로 건강했다. 밖에 산책을 데리고 나가면 다들 개의 나이를 듣고 놀라곤 했다. 그 정도로 나이가 많을 줄 몰랐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급격하게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영화를 보느라 밤을 샌 그 날 이후로.


21일 이후로 지금까지 약 2주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 밤에 실수를 하지 않은 날이 없다. 아니다. 실수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했다. 화장실로 이용하던 베란다 문 앞 싸는 것은 실수이겠지만, 온 집안에, 그것도 소변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행동은 실수라고 하기는 뭐하다. 


처음에는 방광염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어도 상태를 보면 아닌 느낌이 든다. 소변 실수 전에도 밤이면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집 안을 자꾸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따금 현관문 앞에 가서 끼잉 낑 울기도 했다. 무언가 대단히 착각한 듯한 태도였다. 내 개는 유난히도 착한 성격이라 산책을 나가자고 조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는 그랬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둘째 유모차에 큰 아이 보드와 개줄을 함께 묶어 데리고 나갈 시절부터 산책 가자고 조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내가 산책줄을 꺼내면 좋아하고, 아니면 무료한 삶에서 맛있는 냄새 정도 쫓아다니며 온순하게 하루를 보냈다. 


가만히 더듬어 보면 첫애를 낳아 키울 때, 개가 산책 나가자고 조르면 내가 화를 냈기 때문인 듯도 하다. 그때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기억도 선명하지는 않다. 산책 나가자고 졸라서 화낸 기억보다 화장실을 잘 못 가려서 혼낸 기억이 더 많다. 멀쩡히 가리던 화장실을 못 가리게 된 것은 태어난 아기에게 모든 관심을 빼앗겨서 심통이 나서였겠지만. 


첫애 때는 방문객을 향해 한두 차례 짖는 일도 있었지만, 둘째 갓난애 시절부터는 짖는 법을 잊었다. 이 점은 참 놀라운 사실인데, 우리집에 온 손님들은 개를 성대 수술 시킨 줄 알 정도이다. 조금 끙끙대는 소리를 내고, 헥헥거리는 소리를 내고, 끼이잉 하고 우는 소리를 낼 뿐이지 컹 하고 짖는 일은 없다. 화장실이 급한데 베란다 문이 잠겨 있어도 발을 동동거리며 끼잉낑 울어대지 컹컹 짖지 않았다. 내가 개 훈련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가 잠들면 쉬잇 하는 제스처와 함께 혼내는 표정이나 냈을 뿐인데, 참으로 영리한 강아지다. 


(이건 여담인데, 근래에 개를 산책시키던 중에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 할머니 두 분이 스쳐 지나가면서 내 개를 향해 "저거 시츄야. 시츄 내가 키워 봤는데, 먹을 거나 밝히고 아주 멍청해."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뒤통수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그것은 댁의 시츄일 뿐입니다. 시츄는 의외로 똑똑합니다. 제 개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 개 자랑은 자기 아이 자랑, 배우자 자랑만큼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재밌을 뿐인 지루하기 짝이 없는 화제이므로 건너뛰도록 하겠다. 아무튼 두 아이와 개를 함께 키우느라 힘든 날이 많았지만, 녀석의 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덕에 그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밤새 헥헥거리며 무엇을 찾아다니는지 분주히 돌아다니던 녀석은 지금 내 곁에서 잠들어 있다. 집 안이 고요해졌다. 적막 속에서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인정하려 애써 본다. 


우리 개가 치매인가 보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우리 개는 치매가 아니라고, 방광염이라고 마구 우겨대던 나는 왜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는 일은 자꾸 미루기만 했나. 병원 열면 데리고 가야겠다.  


치매이면 어떤가? 화장실을 좀 못 가릴 뿐, 치매라면 이토록 얌전한 치매가 있을 수 있겠나. 밤잠을 못 자고, 밤새 분주히 어디론가 가려고 버둥대는 증상이 있지만, 내가 새벽에 깨어나 다른 식구들이 밟기 전에 오줌을 치우게 만들기는 하지만, 이만하면 착하다. 팔순 노인이 망령난 경우에 사람도 흉악스러울 정도로 괴이한 행동을 하던데, 우리 개 좀 보라지. 으르렁거리는 일 없고, 크게 짖는 일도 없고, 온순하게 헥헥거리며 온 집안을 산책 다니는 정도라면 예쁜 치매가 아닌가. 


녀석은 여전히 내가 미안해질 정도로 착하다.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좀 더 함께 걸어야 한다.


좀 전에 강아지용 기저귀를 주문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녀석이 다시 화장실을 잘 가리게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수캐 중에는 평생 마킹하고 화장실 못 가리는 애들도 있던데, 16년 간이나 화장실 잘 찾아다녀 줬으니 나한테 할 만큼 했지. 우리 강아지가. 


기저귀 차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애정 라이벌 형제들도 다 컸으니 네 어리광 자리가 비었으리라 여겨도 돼. 의젓하던 녀석이 남은 날을 어리광으로 채우려 들면 받아줘야지. 


어쩐지 요즘, 녀석의 얼굴이 더 예쁘다. 


지난 겨울에 아파트 근처를 벗어나는 산책을 해보려고 창고에서 아이들 어릴 때 타던 유모차를 꺼내고 무릎 담요까지 동원했던 날의 사진. 개귀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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