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살고 쓰다
"인간 사이에서 사회체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안정화 요인은 사랑의 현상이다. 이는 타자를 생활의 일부 또는 모든 차원에서 동반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 움베르또 R.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J. 바렐라 공저, 정현주 옮김. 『자기생성과 인지』, 갈무리, 2023. p.46.
근래에는 도서관을 주로 이용하려 애쓰는 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 4월에 구입할 도서를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서 고르고 고를 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자기생성과 인지』를 결재 목록에 올릴 때는 "내가 너무 사치를 부리나?" 하는 심정이었다. 아닐 세스의『내가 된다는 것』을 도서관 대여로 읽고 나니 예전에 전자책으로 읽었던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끼고 아는 존재』생각이 났고, 『자기생성과 인지』도 읽어 보고 싶어졌는데, 도서관에서 구할 수도 없고 전자책도 아직 출시되지 않아서 새책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입의 클릭을 하는 그 순간에도 "내가 이 책을 반이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서문을 읽다가 요즘의 내 생활을 반추하게 만드는 문장을 만났다. 나의 가족을 안정화시킨 사랑의 현상은 사실 작은 시츄 한 마리라는 타자를 생활의 동반자로 간주하면서부터였다.
나의 작은 개는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1주년 되던 해에 우리 집에 들어왔다. 남편은 2교대를 하던 시절이라 하루 걸러 하룻밤 집에 들어왔고, 낮에는 들어와 잠만 자는 날도 있었고 아예 없는 날도 있었다. 계산상으로는 하루 걸러 하루는 휴일이어야 했지만, 비번 활동이니 비상근무니 하는 것들이 잡혀서 오지 않았다.
우리는 장기 연애를 하고 결혼했는데, 남편의 일방적인 고집으로 나는 직장생활을 접고 지방으로 내려와 집순이가 되어 있었다. 결혼 6개월 차에 아이 소식이 없다며 시댁 동네의 한의원으로 끌려갔고, 신혼부부는 자주 다퉜다. 결혼에 대한 모든 결정이 후회로 물들고 있었다.
아마 개 한 마리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때 그 집을 떠났을 것이다. 그 결정이 만들어낸 평행우주 세계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한 번에 한 가지 방식으로밖에 살 수 없으므로 나쁘지 않은 그 세계는 내 인생에서 멀어져 갔다. 대신에 나는 온갖 고생 끝에 4년 뒤에 첫 아이를 낳았고, 3년 터울로 둘째를 낳았다. 그리고 늙어가는 개와 함께 개구장이 형제를 키우는 정신 없는 삶을 살았다.
'늙어가는 개' 라는 말은 참 중요한데,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의 개는 벌써 6살이었기 때문이다. 데려올 때 개는 7~8개월로 추정되는 나이였다. 우리 결혼과 개의 나이는 햇수로 같다.
6살이었던 당시에 개는 무던히도 나를 힘들게 했다. 개를 키워보는 일이 처음이었던 나는 그 일에 적응할 즈음에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키워보는 일이 처음이라 당황한 상태에서 이상행동을 하는 개까지 돌봐야 했다.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개가 실수한 오줌자국들을 치우던 기억이 난다. 개가 짖어서 아이를 깨울까봐 대문에 크게 초인종을 누르지 말라고 썼는데, 그래도 초인종을 누르던 사람들도 기억이 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에서 아이를 키우느라 아이를 업고 오르내리며 수유 때문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며 문을 열면 집 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던 기억도 난다. 그때는 너무 화가 나서 개에게 소리도 질렀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육아에 낙담해 혼자 울었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니 퉁퉁 분 젖을 짜낼 시간도 없이 틈만 생기면 쪽잠을 잔 탓에 유선염에 걸려서 고열에 시달리며 벌벌 떨었던 기억도 난다. 그래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면 가뜩이나 개를 못마땅해하던 남편과 시댁에서 개를 친정이나 시댁 마당에 묶어두라고 할까봐 아무 소리도 못했다. 그건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제까지 자식처럼 키우던 개를 진짜 자식이 생겼다고 내다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단련되어 갔고, 나의 개는 조용한 개가 되어 갔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묻곤 했다. 개를 성대 수술이라도 시켰느냐고.
정신없이 사느라 내 개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는지 신경쓸 틈도 없었는데, 타인들의 말에 그제서야 내 개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의 개는 맛있는 냄새가 날 때 먹고 싶다는 표현으로, 혹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베란다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끼이잉~ 하고 울 뿐이지 컹컹 하고 짖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게 내 개에 대한 자랑으로 알았다. 집에 온 손님들도 칭찬으로 그 말을 했다. 이렇게 조용한 개는 처음 봤다고.
이번에 개가 많이 아파서 수술을 하고 나서 찾아보니 개가 짖지 않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개통령 강형욱 훈련사가 한 말이니 틀린 정보는 아닐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짖지 않으면 아파트 같은 환경에서 키우는 사람에게나 좋지, 개 자신에게는 뭐가 좋았을까? 개는 말을 못하니까 오로지 참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인가? 내 개는 잠꼬대를 자주 했다. 깊이 잠들면 목을 울리며 짖을 때와 비슷한 소리를 내곤 했다. 진짜 짖는 것은 아니고, 마치 짖는 것처럼 목구멍을 울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게 꼭 하소연, 신세한탄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시를 쓴 날도 있다. (하단에 전문 기재) 느낌이었지만 얼추 맞춘 게 아니었을까? 녀석은 잠꼬대로나마 하소연을 하면서 지냈던 것은 아닐까?
생식기 옆을 손가락 한마디가 넘게 찢은 큰 수술을 해서 그런지 요즘 개가 좀 변했다. 베란다 문이 닫혀 있으면 울어 보지도 않고 그냥 그 앞에 싸 버린다. 수술 전에 병증이 심해 소변을 줄줄 흘리고 다녔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 자리에 패드를 깔아두긴 했는데, 그래도 저건 너무 뻔뻔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가서 그냥 거기 싸고 온다. 베란다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기도 귀찮은 것 같다. 열려 있으면 들어가고 닫혀 있으면 그냥 패드에 싼다.
또 우리가 식사를 하거나 말거나 맛있는 냄새가 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잔다. 예전에는 식탐이 엄청나서 사람이 식사를 하면 자기도 밥을 달라 울어대곤 했는데, 요새는 손으로 사료를 받쳐줘야 몇 알 먹고 만사가 귀찮은 듯 주로 엎드려 있다. 실밥을 풀러가서 수의사에게 물어보니, 지금 '쿠싱' 약이라는 호르몬제를 결석 예방용으로 먹고 있는데, 그 때문일 수도 있다고 했다. 호르몬제 부작용이 아니라, 그 전에 호르몬 이상이 있어서 식탐도 왕성하고 물도 많이 먹고 그랬는데, 호르몬이 정상수치가 되면서 증상이 없어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약간의 정신적 충격이 왔다. 나는 내 개에 대해 오해하면서 살고 있었구나. 식탐 대마왕이 본래 성격인 줄 알았더니. 그게 병이었대.
개가 식욕을 잃었는데 돌릴 방법이 없다. 우리 개는 개풀 뜯는 소리라는 농담이 무색하게 풀을 너무 좋아해서 상추, 깻잎, 치커리, 무, 오이, 당근 할 것 없이 신나게 잡수시곤 했는데, 그게 다 결석 유발 식품이라고 했다. 좋아하던 것을 하나도 줄 수가 없다. 입맛 까다롭게 사료 냄새만 킁킁 맡아보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내 개가 아닌 것처럼 낯설다.
퇴원할 때 수의사가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개의 가슴에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흑색종이 있는데, 처음에는 아주 작고 편평했다가 몇 년에 걸쳐 점점 커진 것이다. 그런데 의사가 조심스럽게 그게 언제부터 있었는지 물었다. 아무 생각없이 몇 년 되었다고 하니까 그럼 그냥 두자고 했다. 흑색종도 양성이 있다고 하면서.
"떼면 안 되나요?" 물었더니, 만약에 손을 댔다가 암이면 확 퍼진다고 했다. 그리고 조직검사를 해서 암이라고 나온다고 해도..... 한 템포 쉬더니 내게 물었다. "항암 치료 하실 건가요?" 나도 한 템포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자각이 들었다. 우리 개 나이가 이미..... 그랬다. 이별할 날이 생각보다 많이 가까웠던 것이다. 결석만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은 유투브 알고리즘이 추천한 영상을 보다가 울었다. 그저 개통령 강형욱 영상인 줄 알았는데, 펫로스 관련 내용이 있는 영상이었다. 잔인한 알고리즘 같으니.
애견을 잃은 어느 아저씨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면 컴컴한 현관에서 마치 개가 마중 나온 듯이 혼잣말을 한다고 한다. 보리야. 알았어. 들어가. 옳지.
개는 없어졌는데 개의 환영은 여전히 그 아저씨의 뇌 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펫로스 증상이란다. 펫로스라니. 그런 건 준비하면 준비가 되려나? 준비하며 지내야 하나?
우리는 십 수년을 함께 하며 안정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어떤 세계도 영원하지 않지만, 영원한 듯 환각을 만들어내야 삶의 전제 조건이 마련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인지 시스템, 생명 유지 원리는 그렇다고 한다. 나라는 하나의 단일체를 가정하는 환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발가락이 나라는 것을 알고, 누가 밟기 전에 얼른 피하지. 아닐 세스의 책에 그 비슷한 내용이 우루루 적혀 있었다.
펫로스를 겪는 남자는 환지통을 겪는 사람과 별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개의 꿈을 상상한다
눈과 귀를 잃어가는 개의 꿈
즐거운 일들이 여전히 많을까?
꿈은 낮의 잔상들이 깨어진 조각이라던데
과학자들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아
논문 안에서 나의 개는
아침과 저녁의 냄새 조각과
텅 빈 낮의 감각으로
긴 꿈을 견뎌야 하니까
개를 데리고 시로 도망가야지
시는 낮에 꾸는 꿈이니까
나와 개는 오래전 살던 집 앞에서
마취약과 씨름하는 중이다
깨어나
내가 속삭이며 계속 그를 부르고
쉽게 잠들고 싶은 개는
나의 부름에 간신히 잠을 이기고
다시 걷는다
가지 마, 잠들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나는 울먹이며 리드 줄을 꼭 쥐고
계속 걷는다
떠나지 않으려고 내 곁에 머물러 주려고
약이 불러들인 잠과 싸우며
한 발 한 발 개가 걷는다
우리는 걷는다 옛집 앞에서
그 후로 십수 년을 함께 걷기 위해서
눈이 멀고 귀가 멀어도 곁에 남아
계속 걷기 위해서
개가 잠 속에서 긴 신음을 토한다
“꿈이라 하소연을 해 볼 수 있구나.”
개의 꿈 속은 온통 나의 냄새로 가득할 것이다
서로의 냄새가
서로의 냄새로
끝나지 않는 산책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