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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 Dec 14. 2021

기억의 기억

그날은 하늘이 하루 종일 금방이라도 비가  듯이 흐린 날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대충  세수에 기름이 번지르르한 얼굴을 친구들에게는 로션을 발라 그런 거라고 둘러댄 아침의 하늘도, '점심시간에 축구해야 하는데  오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하며 급식엔 집중하지 못한  허겁지겁 수저를 뜨며 바라본 하늘도,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하교하려다가 내가 오늘 도서관 청소당번이었음을 깨달았던 하교 시간의 하늘도 '마치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듯한 하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장난기 있는 아이의 얼굴을 띈 채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을 아무렇지 않은 척 비틀어놓는 우디 앨런의 영화처럼 도서관 청소를 대충 마치고 집으로 뛰어가려는 그 순간, 비는 쏟아지기 시작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먼저 집에 간 후였고, 친하지 않은 다른 반 친구들에게 능청스레 우산을 같이 쓰자 말할 만큼 넉살이 있는 아이가 아니었던 14살의 나는 그 순간 결심을 한다.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기로.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쫄딱 맞아가며 집으로 향한 그 10분과,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한 후 불 꺼진 거실 바닥에 누워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본 1시간은 내게 여름에 대한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 덕분에 나는 비 오기 전 습기 가득 찬 하늘이 풍기는 여름의 냄새에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은 채 문밖을 나설 수 있게 되었고, 누군가에겐 남는 건 비주얼뿐인 심심하고 밋밋한 '호우시절'이라는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게 되었고, 퇴근길 갑자기 내리는 비에도 편의점에서 급하게 비닐우산을 사기보다는 비를 맞으며 집을 향하는 어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물감이 살짝 번진 수채화 같은 기억을 꺼내어 볼 때마다, 내 마음속 한구석에선 작은 의심이 곰팡이처럼 퍼지기 시작한다. '그날 정말 내가 도서관 청소 당번이었나?', '정말 내가 누워서 한 시간 동안 비 오는 풍경을 바라봤었나? 학원을 안 가고??', '교복이 비에 쫄딱 맞았는데 다음날 학교엔 뭐 입고 갔지?, 그땐 건조기도 없었는데?'

 

이렇게 스스로의 기억의 진위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를 때면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인 '나의 나무 아래서'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된다. 오에 겐자부로는 어린 시절 비 오는 숲에서 조난당한 후 가까스로 구출되어 심한 열병을 앓은 적이 있다고 한다. 심한 열병으로 앓던 어린 시절의 겐자부로는 어머니 무릎 가에 누워 느릿느릿 물어본다. '엄마, 나 죽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겐자부로의 어머니가 대답한다. '난, 네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 이야기를 들은 겐자부로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이 이 아인 죽을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는걸'.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동안 생각한 후 이렇게 말한다. '만약 네가 죽더라도 내가 또다시 널 낳아줄 테니까 걱정 마. 내 몸에서 태어나서 네가 이제껏 보고 들었던 것들과 읽은 것, 너 자신이 해왔던 일들 모두를 새로운 너한테 이야기해 줄 거야. 그러면 지금 네가 알고 있는 말을 새로운 너도 사용하게 될 테니까 두 아이는 완전히 똑같아지는 거야.'

 

이렇게 나는,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는 나의 기억인지, 먼저 세상을 떠난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을 그대로 전달받은 기억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순수한 상상인지 모를 여러 가지 기억의 파편들이 뭉쳐져 그럴듯한 모습으로 31살 11월의 한때를 지내고 있다. 지금의 이 기억 또한 다음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로 흡수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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