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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병 Dec 11. 2020

[축구 좋아하는 여자가 살아가는 법 #4]

#4. 합숙 중에 만난 최고와 최악

대회 일주일 전. 우리는 합숙을 시작했다.


예? 갑자기 합숙이요?


대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두 달 남짓이었다. 우승이 목표였던 우리는(아니 우리 아빠는) 대회를 일주일 남겨놓은 채 합숙 훈련에 들어갔다. 합숙 훈련과 동시에 우리는 유니폼과, 축구화, 신가드, 축구양말, 가방 등 축구 선수용품 패키지를 받았다. 와! 나 진짜 축구 선수가 된 것 같잖아? 축구 용품을 받자마자 나는 유성 매직으로 가져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협박 메시지를 온갖 곳에 삐뚤빼뚤 새겨 넣었다. '잼병이 꺼'.


매직 냄새가 풀풀 나는 장비로 온 몸을 무장하니, 운동장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내내 운동장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비가 오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비가 오는 날에는 감독님과 코치님이 쉬자고 했으나 같이 합숙훈련을 받던 남학생들이 비올 때 축구해야 진짜 재밌는 거라며 경기를 하자고 했다.


'음.. 감기 걸리면? 감기 걸리면 대회에 지장 있는 거 아닐까?'


그러나 3초 후


'아 몰라.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거지! 국가대표도 아닌데.'


내가 입은 빨간색 유니폼은 국가대표팀의 그것과 같았지만 나는 국가대표가 아니었다. 컨디션 관리? 그런 거 모른다. 오로지 축구가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빗속을 추적추적 걷다 보니 운동장에 도착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경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


그렇게 경기는 이상한 두근거림과 함께 시작됐고, 우리는 빗물인지 콧물인지, 땀인지 침인지 모를 것들로 시원하게 세수를 하면서 축구를 했다. 앞은 잘 보이지 않았고 공은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지만 내 기분만은 최고였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있나? 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기분이 온몸 구석구석 타고 흘렀다. 속눈썹에 빗방울이 맺히면서 초록색의 운동장이 블러 처리가 됐을 때 공을 차면, 툭. 빗방울이 떨어지며 시야가 맑아졌다. 이 날 나한테 경기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이 기분. 이 기분을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했다.(아무래도 경기 결과가 기억이 안나는 걸 보면 졌던 게 확실하다.) 그렇게 남자팀과의 수중전이 상쾌하게 끝났다.


축축이 젖은 몸을 수건으로 감싸고 숙소에 들어선 순간 나는 또 새로운 무언가와 마주해야만 했다. 킁킁.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란 말인가? 아뿔싸. 열심히 세수하던 그것이 땀이었구나. 그리고 우리는 합숙 중이고.... 최악이었다. 상쾌하던 기분은 그새 어디로 날아가버리고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찝찝함과 구린내가 방 안에 가득했다. '남자애들한테서나 나는 냄새인 줄 알았는데 나한테도 이런 냄새가 날 수가 있구나.'를 깨닫는 순간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누가 먼저 씻을 것인가? 나다. 왜냐고? 나는 6학년이었으니까!(나 꼰대였나..?) 어쨌든 몸에 묻은 찝찝함과 구린내는 6학년, 5학년, 4학년 순으로 털어냈고, 우리는 '수중전도 해봤는데 우승은 어렵지 않겠지!'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귀여운 대화를 나누다가 잠에 들었다.


나의 첫 수중전은 나에게 최고와 최악을 동시에 선사하면서 내 머릿속 한켠에 진하게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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