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을 말하기 전에 -
"하니, 나 ..랑 헤어졌어."
오랫동안 말이 없다. 분주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발소리와 웅성거림, 지하철의 안내 방송 소리가 낮고 일정한 전자파 백색 소음처럼 고요를 메우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 언니가 소리 없이 운.다. 자기가 슬퍼하는 것을 보면 내가 더 슬플까 봐 애써 조용히 추스르는 그 고요가 애달프게 전해진다. 사무실의 누군가가 보기라도 할까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그 날 따라 시리도록 아름답게 푸르기만 한 4월의 파리 하늘을 바라보며 숨죽여 그녀와 함께 울었다. 퇴근길 러시아워에 지하철 의자에 앉아 울고 있을 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목구멍을 막고 있는 슬픔의 무게는 오래된 시계추처럼 멈출 줄 모르고 달랑거렸다. 유학생활과 타지 생활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오랜만에 듣는 가족의 목소리에 꾸역꾸역 슬픔과 눈물을 삼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효정아 어떻게 언니가 갈까?"
택시 타고 올 거리라면 민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이야 조금 넣어두고 그러라 하겠으나, 나를 위해 비행기 티켓을 끊어 서울에서 파리까지 오겠다는 그녀의 말에 선 듯 그러라 하지 못했다. 엄마랑 같이 가서 시간 보내자고 나를 조용히 다독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현실은 나를 붙들어 맸다. 그들을 맞을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분함과 엄마라는 두 마디에 조금 안정이 되었던 마음이 마치 간간히 지탱하던 몸이 큰 파도에 휩쓸리듯 무너졌다. 아니다. 여기 일 잘 정리되는 대로 만나러 가겠다고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고 나니 내가 뭘 이루겠다고 혈혈단신 여기에 있나 싶었다. 파리, 미치도록 사랑해서 8년을 살아온 도시, 그래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