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운요호는 1868년 영국에서 건조한 목조 기선으로 2개의 돛대를 달았으며, 크기는 162톤, 37미터 X7.5미터이다. 정원은 66명, 포함으로 100파운드 포와 40파운드 포 각각 1문과 20파운드 포 2문을 갖추었다. 운요호 사건 이듬해인 1876년 10월 31일 폭풍우로 침몰하였다.
1. 운요호 사건에 대한 일본의 기록이 조작된 이유는?
운요호 사건은 1875년 9월 20일(양력 기준)부터 22일까지 일본 군함 운요호의 도발로 강화도 일대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교전한 사건을 의미한다.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공식 보고서를 조작하였다. 운요호의 강화도 접근을 식수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3일의 전투를 하루 만에 치러진 것으로 축소 기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사건 조작의 목적은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조선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조선이 운요호를 먼저 공격했고, 운요호가 어쩔 수 없이 이에 대응했다는 논리가 만들어질 경우 일본의 침략성은 감춰지고 그 책임은 조선에게 돌아가게 된다. 아울러 운요호가 영종도 일대에서 행했던 약탈과 살상 행위는 정당방위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운요호 사건이 조선 측의 발포에 대응한 연속적 행위로 보이기 위해, 21일 초지진 공격과 22일 영종성 함락을 20일 하루 동안 일어났던 사건으로 조작한 것이다.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을 피해 간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조작했으며, 심지어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조선 대표가 운요호의 불법적인 영해 침입을 항의하자, 해당 발언을 『일본외교문서』에서 빼 버리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2002년 운요호 사건의 일지가 발굴되면서 일부나마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2. 일본이 기록한 운요호 사건은?
9월 12일 나가사키항을 출항한 운요호는 조선의 서남해안에서 중국의 잉커우까지의 항로를 탐색하던 중 식수가 떨어져 강화도에 정박하게 된다. 운요호는 9월 19일 월미도 앞에 정박했다가, 다음날 아침 항산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함장 이노우에는 작은 보트를 내려 주변을 살피다가 우연히 초지진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식수를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보트가 초지진에 접근하자 조선 측에서 갑자기 선제 포격을 실시했고, 이를 알게 된 운요호가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대포를 쏘아 맞대응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의 교전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로 정오 무렵 종료되다. 곧이어 2시 30분경부터 운요호는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을 습격하여 35명의 조선인을 살해하고 건물과 민가를 불태웠다. 그날 저녁 물류도에서 식수를 구한 운요호는 조선을 떠나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일본의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한 운요호 사건이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운요호 사건은 9월 20일에 운요호가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교전 당시 국제법에 따라 일본 국기를 게양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즉 선제 포격의 책임은 조선에게 있고, 일본은 국제법을 준수했다는 것이다.
3. 일지에 근거한 운요호 사건의 실상은?
앞의 글(청이 조선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는 비밀 자문을 보내다)에서 언급했듯이 1차 운요호 시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는 해군성에 한반도 출병을 건의한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운요호의 홋카이도 항해 명령이 떨어진다. 이에 이노우에 요시카는 운항 도중 고베에 들려 해군대보 가와무라 스미요시를 만나 홋카이도 항해 명령에 대해 탄원하고, 결국 중국 잉커우로의 항해 허락을 얻어낸다. 이 만남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나왔는지는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이노우에 함장은 잉커우 항해를 명분으로 삼아 조선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 9월 20일
운요호는 전라도의 소안도를 지나 9월 19일 오후 4시 32분 월미도 연안에 도착한다. 다음날 오전 8시 39분 월미도를 출발한 운요호는 오전 10시에 영종성 위쪽의 매도를 북서로 바라보며 닻을 내린다. 이때 운요호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작성한 강화도 측량도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운요호가 의도적으로 강화도에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오후 1시 40분에 함장을 포함 일부 인원들이 무장을 한 채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를 향해 나아간다. 명분은 측량이었지만 항해일지에는 측량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 비추어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오후 4시 7분에 보트는 항산도 포대를 통과하였고, 4시 22분에 초지진 포대 앞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초지진에 상륙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4시 30분에 초지진 앞을 지나간다. 이때 초지진에서 보트를 겨냥하여 대포를 발사하였고, 이들은 소총으로 응사하였다. 4시 57분에 교전은 종료됐고, 보트는 오후 9시에 운요호로 복귀하였다.
이 과정에서 운요호가 왜 초지진에 상륙하지 않고 그 앞을 지나가려고 했는지는 명확한 설명이 없다. 다만 함장 이노우에가 출항 전 주변 사람에게 “조선이 발포를 하면 다행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조선군의 포격을 유도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 9월 21일: 초지진 포대와의 전투
운요호는 오전 8시에 돛대에 국기를 게양하고 초지진 포대로 향해 나아갔다. 운요호는 10시 42분에 초지진 포대 앞에 도착하였고, 거리를 시험하기 위해 40파운드 포를 발포하자, 조선 포대에서도 응사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운요호의 선제공격이 전투로 이어진 것이다.
운요호는 12시 40분까지 27발의 포를 발사하여 초지진 포대의 흉벽 두 곳을 격파하였다. 반면 초지진의 포는 평균 사거리가 600~700미터에 불과해 운요호에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갯벌로 인해 일본군의 상륙이 쉽지 않다고 판단한 운요호는 12시 56분 초지진 앞을 떠났고, 오후 1시 15분 항산도 포대 아래에 도착한다. 점심 식사 후 오후 2시 40분에 항산도 포대에 상륙하여 불태우고, 오후 6시 5분에 항산도 포대를 출발하여 7시 33분에 매도의 남쪽에 도착하여 정박한다.
☞ 9월 22일: 영종성 전투
운요호는 전투 준비 후 오전 5시 55분 영종성을 향해 나아간다. 운요호의 기습 포격으로 영종성의 조선군은 대응 사격도 하지 못한 채 전투를 위해 모였다. 7시 43분에 2척의 보트에 나눠 탄 일본군이 해안에 상륙하였고, 조선군과 일본군은 약 8분 정도의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대부분의 조선군은 도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종성 병사 35명이 사살되었으며, 운요호 병사는 2명만 부상을 입었다.(이 중 1명은 운요호 복귀 후 사망) 이후 일본군은 영종성에서 전리품을 노획하였고, 오후 10시 30분 모두 운요호로 철수하였다. 이틀 후인 4월 24일 운요호는 나가사키항으로 귀항하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공식 보고서를 조작하였을까? 이는 이어지는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과 관련이 깊다. 강화도 조약 협상에서 일본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운요호의 불법적 사실이 드러나면 안 되었다. 그래서 국제법에 근거해 문제가 될만한 소지들을 모두 없앴던 것이다. 사건을 하루 동안 일어난 것으로, 운요호의 접근 목적을 식수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운요호가 처음부터 일본 국기를 달고 있었다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조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조작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관련 있다는 내용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은 이 보고서의 내용을 근거로 강화도 조약 당시 자신들에게 유리한 논리를 전개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 출처
「운요호 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김흥수, 2009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김종학, 2016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김흥수,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