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 조약을 대하는 청과 일본의 속내
이 장면은 구로다 기요타카와 신헌 사이에 진행되었던 강화도 조약의 협상 장면이다.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을 명분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였다. 청의 이홍장도 여러 차례 영의정 이유원에게 서한을 보내 개항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조선의 개항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 사절단의 강화부 입성을 허락하고 협상에 응하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 정부는 이전과 달리 왜 일본 사절단의 입성을 허락하고 교섭을 진행했을까?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과의 국교 체결을 추진하였다. 운요호의 잘못은 덮어두고 조선 측에 잘못을 덮어씌워 조약을 체결하려는 심산이었다. 이를 위해 1875년 12월 구로다 기요타카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각각 전권변리대신과 부대신으로 임명하고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에 파견하였다.
일본 정부는 동시에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하여 육군경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시모노세키에 대기시켜 언제라도 조선에 군대를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훗날(1888년) 러시아와 청나라에 대해 일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이익선 - 일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경계선)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군함 6척과 병력 809명을 이끌고 한반도로 출발한 구로다 일행은 부산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였고, 1876년 2월 10일 (양력 기준)에 강화도에 도착한다. 이때 사전 교섭을 위해 미리 강화부에 입성했던 모리야마 시게루는 윤자승에게 4,000여 명이 왔다고 병력을 과장하였다. 강화부에서는 정부의 사전 지시에 따라 별다른 무력 충돌 없이 사절단의 입성과 접견을 허락하였다.
당시 청은 이홍장 등이 주도하여 양무운동(1861~1894)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중국 서북부의 일리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러시아가 혼란을 틈타 군대를 보내 일리 지방을 무력으로 점령(1871~1881)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본이 1874년 타이완을 공격하면서 청 정부 내에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
이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변란이 발생할 경우 청은 조선에 개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실권자였던 이홍장은 조선에서 변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정도에서 조선 문제를 다루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유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에 개항을 권유하였다.
한편 일본도 교섭이 결렬될 경우 조선과 전쟁을 벌이기는 여의치 않았다. 메이지 정부에 대한 국내 반발도 지속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조선과 전쟁을 시작할 경우 청의 개입 여지가 높았다. 만약 전쟁에 패배한다면 메이지 정부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할 것이 분명하였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 전권변리대신에게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전투행위의 개시는 불허한다는 지침을 비밀리에 내린 상황이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그동안 조선 정부는 열강의 불법적인 접근에 맞서 무력으로 대응했었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의 사절단이 왔을 때는 별다른 무력 충돌 없이 접견을 허락하였다. 이는 확실히 이전과 다른 대응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일본의 사전 외교 공작이었다. 일본은 사절단의 조선 파견을 결정한 이후, 모리 아리노리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여 청에 파견하였다. 모리는 이홍장과의 회담에서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응한다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해당 내용을 담은 각서를 청의 총리아문에 제출하였다. 이 각서는 청의 예부를 통해 2월 4일 조선 정부에 도착하였다. 일본 선단에 대한 대책을 논의 중이던 조선 정부는 이 자문을 접수하고, 그 영향을 받아 ‘먼저 범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과의 접견 임무를 맡았던 접견부관 윤자승은 2월 5일 모리야마 시게루와의 예비회담에서 정부의 지침에 따라 별다른 무력충돌 없이 사절단의 입성과 접견을 허락하게 된다. 결국 2월 10일 일본 사절단은 강화부에 들어왔고, 2월 11일부터 조선과의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