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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 Weaver Jun 13. 2023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은?

- 구로다 기요타카와 신헌의 교섭이 진행되다.

<출처: 나무위키>
<출처: 나무위키>


아래 인물은 일본측 전권변리대신인 구로다 기요타카, 위의 인물은 조선측 접견대관인 신헌이다. 1876년 2월 11일 시작된 두 사람의 회담은 27일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전통적 만국공법[국제법]의 국제 질서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일본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지만, 조선은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신헌은 단지 일본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접견대관’이었기 때문에 근대 조약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인물이었다. 이 상황에서 전개된 회담은 일본의 의도한 대로 진행되어갔다.   


1. 조약 체결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준비는? 

   강화도 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은 총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2월 11일(양력 기준) 열린 첫 회담에서 구로다는 조선 측에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제기하였다. 운요호가 일본 국기를 게양했음에도 조선 병사들이 공격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논리였다(참고: [일본이 운요호 사건의 보고서를 조작하다]().) 이에 조선측 접견대관인 신헌은 사전 통고 없이 조선 해역을 침범한 운요호의 불법성을 들어 항변하였다. 

   다음날(2월 12일)에 열린 2차 회담에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의 해결책으로 조약 체결을 요구하고, 13개 조관으로 구성된 조약 초안을 제시하였다. 사절단 파견의 목적이 조약 체결이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를 사전에 알아채지 못하였다. 2차 회담 이전까지 일본은 운요호 사건과 서계 문제만을 언급했을 뿐 조약 체결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일본이 파견한 대표 구로다의 직함도 ‘전권변리대신’이었다. ‘변리’란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조선측 대표인 신헌의 직함도 사절단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접견대관’이었고, 조약 체결에 관한 일체의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신헌은 일단 일본이 제시한 초안을 조정에 보내어 10일 이내에 그 결과를 통보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후 역관 오경석에게 일본 숙소로 가서 일본어로 된 초안을 번역하고 필사할 것을 명하였다. 

   2월 13일에 일본 측의 요구로 제3차 회담이 열렸다. 조규 초안의 번역과 필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양측의 기록이 서로 달라 정확한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은 신헌이 일부러 지연책을 편다고 판단하여, 조선의 답장이 지연될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통보하였다.


2. 일본의 개항 요구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은? 

   13일 밤에 조규 초안이 정부로 보내졌고, 14일 고종과 시원임 대신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회의는 일본의 행위가 전쟁을 도발하는데 있다는 비난만 있을 뿐, 누구도 구체적인 대응책을 내놓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우의정 김병국의 제안에 따라 신헌의 보고를 기다려 대책을 결정하기로 한 채 회의는 끝이 났다. 

   15일 제3차 회담 내용과 일본 측의 제시한 조약 초안의 한문 번역본이 보고되었고, 사흘 뒤인 18일에는 일본의 조약 체결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통보가 신헌에게 전해졌다. 이어 19일에는 신헌에게 재량껏 결정하라는 전교가 내려졌다. 이 기간 동안 공식적인 회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 조약 체결이 결정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평소 개항의 필요성을 내세웠던 박규수, 청의 이홍장과 편지를 주고 받았던 이유원, 흥선대원군과 대척점에 있었던 이최응 등이 고종의 지지를 얻어 조약 체결 결정을 내렸다는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19일 전권을 부여받은 신헌은 일본 수행원 미야모토 오카즈 등을 만나 조규 초안의 각 조관을 심의했다. 여기에서 일본이 제시한 13개조의 내용 중 최혜국대우와 관련된 부분은 삭제되었고, ‘대’자와 ‘황제폐하’ 등의 용어가 수정되었다. 이는 이미 신헌이 조정으로부터 전달받은 사항이었기 때문에, 오경석이 21일 한양에서 가지고 온 정부의 조약 초안 검토 결과와 거의 동일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조약 비준 형식과 운요호 사건에 관한 조선 정부의 입장을 놓고 구로다가 20일에 돌연 협상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측에서 요구한 조선 국왕의 친필 서명은 윗 사람의 이름을 피휘하는 조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1871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청일수호조규에서 청 황제의 서명이 없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고종 황제의 친필 서명은  일본 입장에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협상을 중단시킬 정도로 이를 문제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의 태도 때문이었다. 출발 전 구로다에게 내려진 비밀 훈령 중 하나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과였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의 일방적인 도발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운요호 사건에 관한 유감 표시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구로다가 일방적인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여 25일에 운요호 사건에 관한 의정부 조회를 보내왔다. 목적을 달성한 구로다는 26일에 강화부성에 다시 들어왔고, 27일 오전 9시 강화 유수영 연무당에서 신헌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에 서명과 검인을 하였다. 이로써 서계 문제 이후 8년여에 걸쳐 타협점을 찾지 못했던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 출처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김흥수, 2022 

•『조일수호조규 근대의 의미를 묻다』, 한일관계연구소, 2017

•『근대 조선과 세계』, 최덕수, 열린책들, 2021

•『신편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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