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코끼리 무리를 식구로 거둔 <나나가 집으로 돌아온 날>
“혹시 성난 코끼리 무리를 입양할 수 있나요?”
툴라툴라 농장으로 걸려 온 전화, 받자마자 들린 목소리다. 사냥으로 괴로워하다 거칠어진 코끼리 무리가 마을을 덮칠까 봐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코끼리들을 떠나보내거나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치고 있으니 품어달라고 한다. 툴라툴라 농장 살림꾼인 로렌스와 프랑수와즈는 선뜻 성난 코끼리 떼를 받아들인다. 코끼리 무리는 입양 오던 날 밤, 울타리를 부수고 달아난다. 가까스로 찾아내어 몰고 온 코끼리들은 큰 소리로 울며 먼지를 일으켰다. 위험하다는 감시원들에게 프랑수와즈는 “슬퍼하는 거예요.”라고 하고, 로렌스는 “아직 겁나서 그래요.”라고 말한다. 코끼리 무리를 아우르는 암 코끼리 이름은 나나다. 로렌스는 나나에게 다가가서 간절한 눈빛으로 “나나야, 제발 가지 마. 떠나면 너와 네 아이가 다칠지도 몰라.” 하고 달랜다.
오월 가정의달을 앞두고 연주한 그림책 <나나가 집으로 돌아온 날 / 킴 톰식 글, 해들리 후퍼 그림 / 불광출판사> 들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를 간추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담았다는 이 책을 한 장 한 장 가만가만 살살 넘겨 가며 목소리 연주를 하면서 한 생각이 스쳤다. 어느 가을날, 뒤에서 달려오던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아이 하나가 나를 지나쳐 가다가 그만, 넘어져서 정강이가 까졌다. 그걸 보는 내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엉덩이 아래에서 정강이까지 찌릿하고 시큰한 게 아렸다. 난생처음 보는 아이였는데…
오월 초닷샛날 어린이날, 여드렛날 어버이날, 열닷샛날 스승의날, 열엿샛날 성년의날, 스무하룻날 부부의날이 빼곡이 들어서 있는 가정의달 틈바구니에 ‘입양의날’이 자리 잡은 줄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열하룻날인 내일은 올해로 열일곱 번째를 맞는 입양의날이다.
귓결에 ‘입양’이라는 말이 스치기라도 하면 내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간다. 그 까닭은 법정 스님에게서 비롯한다. 어느 법석에서 스님은 “새로 옮겨 심은 나무들이 한동안 시름시름 몸살 하는 까닭은 흙과 바람과 물이 낯설어서 그렇다”라고 하면서, “사람이 제가 태어난 어머니 품을 떠나 엉뚱한 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까닭을 짚기에 앞서 매우 아픈 일”이라고 말씀했다. 그러면서 가까운 이에게 받은 편지를 들려줬다.
프랑스에 유학하는 우리나라 여학생이 부탁을 받아 프랑스 가정을 찾아갔다. 부부는 “지난주 한국에서 어린애를 입양했는데, 잘 먹지도 않고 줄곧 울기만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어린애를 어떻게 무슨 말로 달래주느냐?”고 물었다. 태어난 지 여섯 달이 채 되지 않은 아기를 받아 안은 여학생, 아기를 다독거리며 가만가만 “아가 아가 울지 마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울지 마라,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하며 우리말로 달래주니 금세 울음을 그치고 여학생을 말끄러미 쳐다봤다. 그 뒤로 몇 주 동안 주말마다 그 집에 가서 아기를 달래주고, 자장가를 녹음해줬다.
편지는 “스님,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란 말로 끝을 맺는다.
대학교수를 내려놓고 변산으로 내려가 공동체를 이루고 스물여덟 해째 살고 계신 윤구병 선생은 <윤구병 일기>에서 입양을 이렇게 말씀한다.
“어디서 고슴도치 한 마리가 불쑥 들어와서 이미 살고 있는 다른 고슴도치와 만나 서로 껴안는 시늉을 하는 거야. 껴안으면 어떻게 될까? 서로 찌르게 되어. 상처가 나고 피가 나지.”
윤 선생 말씀처럼 남을 거두어 한솥밥을 나눠 먹는 식구가 되기란 조개가 사금파리를 품어 온갖 아픔을 삭이면서 진주를 만드는 것처럼 아리고 쓰라릴 테다.
<나나가 집으로 돌아온 날>에서 나나를 비롯한 코끼리 식구들과 로렌스·프랑수와즈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 발 한 발 가까워진 나나와 로렌스. 마침내 코끼리들은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넓디넓은 툴라툴라 농장 덤불 속으로 들어가 넉넉하니 살아간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허연 로렌스가 숨을 거둔다. 바로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농장으로 발길을 돌린 나나와 그 식구들이 사흘에 걸쳐 로렌스와 프랑수와즈가 사는 집으로 돌아온다.
실화여서 더 뭉클했다. 뭉클하고 따뜻한 얘기로 남기까지 나나와 코끼리 식구들 그리고 로렌스와 프랑스와즈는 서로 섞이면서 어떤 아픔을 얼마나 겪었을까?
입양, 입양은 일본에서 들온말이고 우리가 쓰던 말은 ‘수양’이다. 수양, 식구로 거두는 일이다. 서로 만나 식구 되기란 앓지 않아도 될 일을 나서서 떠맡아 앓는 일이다. 서로 마음을 내면 어울릴 수 있겠느냐고 생각해봤으나 그것이 잘 안 된다고 말씀하는 윤구병 선생은 결국 자연이 보듬어 안아주어 풀린다고 한다. 사이가 좋아지려면 촌스러워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촌스럽다는 말을 싫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컨트리’라고 하면 어떨까? 촌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은 믿사람, 기댈 수 있을 만큼 믿음직한 사람이라 말로 ‘본디 사람다움’을 짚는 말이다. 툴라툴라 농장 살림꾼 로렌스와 프랑수와즈가 코끼리 무리를 선뜻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촌스러웠기 때문이리라.
새 식구를 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서로 거두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늘 함께 있어 같이 산다는 느낌도 들지 않을 만큼 가까운 식구를 비롯하여 이웃과 동무, 마을 사람들 그리고 직장에서 동아리에서 적지 않은 이들을 거두지 않고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다. 입양의날을 맞아 곁을 오가는 이들을 맞아 서로 부대끼면서 생기는 생채기를 어떻게 삭여야 할지 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