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쪽에 서 있었던 시간
예전에 나는 〈체인소맨〉을 보며 잔인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감수성 때문일 거라고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에는 판단이라기보다 거리 두기가 섞여 있었다.
이해하려 하기보다 분류하려는 태도였고, 솔직히 말해 꽤 꼰대스러웠다.
요즘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면서 그 시선이 조금 이동했다.
〈아인〉, 〈기생수〉, 그리고 다시 〈체인소맨〉까지 이어서 보다 보니
이 잔인함은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역치의 문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보여주느냐보다
어디까지 가야 반응이 오는가에 대한 문제 말이다.
현대인은 이미 너무 많은 장면을 본다.
뉴스와 영상, 실시간으로 유통되는 재난과 폭력 속에서
죽음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배경에 가깝다.
감수성이 무뎌졌다기보다는
이미 감각이 과부하 상태에 놓여 있다.
이 상태에서 예전처럼 은유와 절제만으로
카탈시스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래서 서사는 더 직접적으로 신경계를 건드린다.
〈체인소맨〉의 잔인함은 쾌락을 주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아직 반응 가능한지”를 묻는 신호처럼 보인다.
이 정도가 아니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시대라는 사실을
굳이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내놓는 방식이다.
〈체인소맨〉을 보며 처음 들었던 감정은
잔인함보다 ‘젊다’는 느낌이었다.
그 젊음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집 앞 풍경이 떠올랐다.
내 집은 상가이고 길과 바로 맞닿아 있다.
건물 구조는 통유리다.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안에서는 밖이 너무 잘 보인다.
그래서 나는 드러난 사람이 아니라
늘 먼저 보는 쪽에 서 있게 된다.
한때 집 앞에는
싸구려 원룸촌에 흩어져 살던 아이들이 있었다.
1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사정도 계층도 제각각인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다녔다.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있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듯
늘 내 집 앞에 와서 앉았다.
가게 앞 계단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고,
상스러운 말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자주 멈칫했다.
쟤네들은 대체 뭐지?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건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 어른도, 범죄자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 아이들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어른’을 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제대로 된 어른이 무엇인지는
나 역시 아직 모르겠다.
그 아이들은 스스로를 ‘패밀리’라고 불렀다.
집이 아닌 곳에서 함께 자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어른 흉내를 냈지만
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였다.
보호받지 못했고, 설명되지도 않았고
그래서 늘 길 위에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훈계를 할 만큼
나도 늙은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서른을 앞둔 이십대였고
그 아이들은 그보다 더 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어른의 자리를 차지하고 설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외출하려고 문을 열고 나가면
아이들은 슬쩍 비켜 앉았다.
하지만 그 ‘비킴’은 어디까지나 형식이었다.
비켜 앉아도 그 자리는 여전히 내 건물의 연속이었고
계단은 출입구였으며
그곳에서 피워지는 담배와 바닥에 떨어지는 침은
분명히 내 생활의 일부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눈빛은 애매했다.
도발적이지도, 순하지도 않은 눈빛.
그래서 나는 존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비난하거나 소리를 높이면
상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흡연하시거나
침을 뱉으시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은 부탁에 가까웠고
나 스스로를 최대한 낮춘 말이기도 했다.
그러자 무리 중에서
체구는 작지만 유난히 깡깡해 보이던 아이 하나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말했다.
“야, 가자. 아줌마가 우리 신고한대.”
‘아줌마’라는 호칭은
모욕이라기보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가장 빠른 단어처럼 들렸다.
아이들은 그렇게 흩어졌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은 흘렀다.
이제 나는 반세기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고
여전히 같은 위치에 서 있다.
그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사회에서 자주 마주치는 성인들의 모습은
우리가 한때 기대했던 ‘어른’의 형상과는 다르다.
아이의 감각을 그대로 가진 채
몸만 비대해진 사람들,
책임을 배우지 못한 상태로
권리와 분노만 커진 사람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성숙의 문제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성숙을 가르쳐줄 구조는
오래전에 이미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도
통유리 너머로 보게 되는 장면들은 계속됐다.
아이들뿐 아니라
나이 든 취객들 역시
유리문 앞에서 소변을 보곤 했다.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 세계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실내에서 그 장면들을 보며
나는 인간이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길 잃은 고양이가
머리만 숨기면
자신은 전부 숨었다고 믿는 것처럼,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면
타인의 시선에서도 사라졌다고 믿는 단순함.
이건 비난이라기보다
관찰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통유리는 나를 노출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위치에 두었다.
그래서 나는 개입자가 아니라
끝까지 목격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체인소맨〉이 젊게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 그 장면들과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옳고 그름 이전에,
해석 이전에,
이미 세계에 던져진 상태.
자신이 보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먼저 살아내야 했던 감각.
이 변화가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꼰대일 수 있다.
다만 예전처럼
잔인함을 문화나 취향의 문제로만 밀어내지는 않게 됐다.
통유리 안쪽에서 본 장면들처럼
시선이 조금 이동했을 뿐이고
그 이동을 부정하지 않고 기록해두는 정도면
나에게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