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선호/우정/졸업-잘 낳은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뭐...
나를 낳은 당사자인 엄마까지 나를 앞에 두고 “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하는 말을 서슴지 않으니 나는 좀 너무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죠. 그렇지만 사실 엄마의 그런 좀 불합리한 욕심 덕분에 내가 태어난 것이니까 섭섭하긴 하더라도 시시한 아들보다 열 곱절 훌륭한 딸이 되는 것으로 복수(?)의 방법을 정했습니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는 것조차 반대하셨다지만 지금은 사실 날 제일 사랑해 주시니까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지만요. p12.
소설 속 마야는 남아선호 사상 속 사회적 분위기를 직접 피부로 느끼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삐뚤어지거나 감정적으로 무너지기보다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황을 받아들인다.
딸이라서 서운해하는 부모 앞에서 그럴 거면 왜 낳았냐고 대들만한데도 오히려 좋은 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긍정의 마인드는 이름에 대한 마야의 태도와 일치하며 이것이 마야의 청소년기 성장이 얼마나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태어나는 것조차 반대했다는 아빠가 그래도 마야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7 공주 중 막내딸로 태어난 내 친구는 그렇게 사랑받지 못했다. 마야에게 오빠가 없었으면 지금처럼 사랑받았을까? 누가 알겠는가 엄마 아빠가 은밀히 동생을 계획하고 있었을지...
우리 아빠나 엄마가 오빠는 또 몰라도 큰언니를 친구끼리 놀러 가게 하지 않을 건 뭐 물어보나 마나 한 일이죠. 아무리 올해가 ‘여성의 해’라지만 그것만은 안될 거예요. (중략) 어디로 훌훌 떠나고 싶어지는 토요일 오후, 배낭을 메고 훌쩍 대문을 열고 나서는 오빠를 볼 때마다 언니들과 나랑은 우리가 여자라는데 커다랗게 절망하곤 합니다. (중략)
부모님, 특히 엄마의 얘기를 빌면 우리는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아주 당당하게 사는 셈이라고 부러워하시고, 또 우리도 대체로 그렇다고 수긍하는 셈이지만 ‘집 밖으로 나가는 자유’의 문제에서만은 여자인 것, 특히 대한민국의 여자인 것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61~62.
오빠는 배낭을 메고 자유롭게 여행에 나서지만, 딸들은 그러지 못하는 데서 성별에 따른 자유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엄마는 딸들이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나 당당하게 사는 셈이라고 얘기하고 어느 정도 수긍하는 마야와 언니들은 정작 자신들이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자유를 제한받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절망한다.
마야가 살았던 곳이 서울이어서 그런지 내가 살았던 시골보다 나아 보인다. 교육적 기회에 있어서 만큼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내가 속해 있는 다섯 꼬마들로 구성된 ‘Finger Club’을 소개합니다. 앗쭈! 이렇게 얘기해 놓고 보니까 무슨 그룹사운드를 소개하는 기분이군요. 우리 클럽의 특징은 첫째, 모두들 키가 1m 51cm를 넘지 못하는 땅꼬마들이라는 것, 둘째, 만났다 하면 1초도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는 것-이쯤 하면 먹은 게 다 어디로 가서 키가 안 크는지 아시겠죠?-, 셋째, 무척 개성들이 강하다는 것. 재잘거렸다 하면 30분 이내에 툭탁거리기 마련이어서, 내분이 극심하니까요. 그렇지만, 그 내분이라는 것도 한 이틀 토닥거리면 대개 또 화평 무드가 돌아오고, 하루쯤 조용하다 싶으면 어느새 또 분규가 일곤 합니다. p40.
핑거클럽(Finger Club)의 정체성과 분위기를 들여다보면 멤버들 면면이 다채롭지만 끈끈한 어린 시절 우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시시때때로 싸우고 다시 금방 화해하고... 유쾌하고 소란한 우정을 보여준다. 비록 중3 때 반이 흩어져도 그들의 우정은 계속된다.
사회 분위기 상 남아선호 사상이 있다 보니 상대적 약자인 소녀들끼리 잘 뭉치고 얘기도 통했으리라...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한 집단이 또래집단이라고 보면 마야에게 핑거클럽은 가족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나 고민거리를 친구들에게 공유하면서 보다 숨 쉴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교육의 장이었을 수도...
그 애-유 선형이는 그날의 그 쉰듯한 허스키보이스와 덤덤한 얼굴과 선량한 미소로 단연 우리 반의 인기스타가 되었습니다. 선형이는 몸짓도 남자아이 같습니다. 약간 덜렁하고, 웃음소리도 털털하고..... 여자 아이뿐인 학교라 그런지 그 애는 단번에 많은 팬을 확보한 것입니다. 나중에 소문을 들어보니까 선형이는 2학년 때도 그렇게 인기스타여서 선형이를 독차지하고자 애들이 서로 싸우고 야단이었다는군요. 공부도 잘하고, 마음씨도 좋고, 항상 서글서글하고, 행동은 곡 남자애 같고, 그래서인지 쩨쩨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군요. 아무튼 굉장한 칭찬만이 그 애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나도 물론 친해 보고는 싶었지만 그 수많은 팬 중의 하나가 되는 영광만은 사양하기로 했습니다. p144.
보이쉬한 행동에 터프하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학급의 압도적 인기를 받고 있는 3학년 때의 친구 선형! 2학년 때부터 이미 스타였고, 성격 좋고 공부도 잘하는 ‘완전체’ 이미지를 갖춘 새 친구.
마야도 호감과 동경을 느끼지만, 많은 팬에 섞여드는 것은 싫어 거리감 있는 존중을 선택함.
마야는 선형에게만큼은 우정 속에서의 선망·질투·거리두기 같은 미묘한 감정들을 보여준다.
현숙이는 요즈음 그저 그 ‘베에토오벤’만 생각하는지 맹해서 도무지 이야기 상대가 안됩니다. p145.
친구들 중에는 꼭 이런 애들 한둘 있다. 다른 이성 친구나 연예인 등에 빠져 동성 친구에게 관심을 덜 기울이는... 현숙이가 꼭 그랬다.
그날부터 주혜와 나는 급속히 친해져 버렸습니다. 주혜는 참 비밀스러운 매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입니다. 별로 아이들과 얘기하지도 않고 늘상 혼자 앉아 책만 보기 때문에 친구도 별로 없고 눈에 띄지도 않아 그저 조용하고 얌전하기만 한 아이 같지만, 그 애가 가슴 깊이 아주 뜨거운 한줄기의 빛을 숨겨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주혜야, 넌 태양을 삼킨 아이 같애. 네 속 깊이에서 그것이 붉게 붉게 아직도 타오르고 있고, 그 빛이 네 눈을 통해 비치는 거 같애.” 내가 그 애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렇듯 찬탄해도 그 애는 그냥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으면서 웃기만 합니다. 우리는 매일 방과 후엔 도서관엘 들러서 책을 읽고, 그리고는 어둑어둑해지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p157.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조용히 책만 읽는 아이 주혜를 통해 마야는 정신적으로 좀 더 성숙해지고 비록 큰오빠를 더 애지중지하는 부모님들이지만 곁에 계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더 크게 가졌으리라. 둘은 말보다 마음으로 닿는 조용한 우정을 나누고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보다 좀 더 성숙한 관계라고나 할까?
내 짝 순정이는 주혜와는 전혀 딴판입니다. 나보다 한술 더 뜨는 수다쟁이이며, 변덕쟁이이며, 늘쌍 시끄러울 만큼 쾌활하고, 다정하고, 아주 맘씨 좋은 덜렁이입니다. 나 같은 수다꾼이 순정이 앞에선 주로 듣는 쪽이라는 걸 보면 순정이 입심이 얼마나 센지 아시겠지요. p160.
마야보다 더한 수다쟁이이자 변덕스럽고 쾌활한 아이로 항상 시끌하고 다정하며 단점까지 귀엽게 보이는 친구다. 가벼운 일상 속 웃음과 에너지가 되는 존재인 순정은 마야의 우정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활력형 친구지만 나중에 자살시도까지 하는 겉과 다르게 알고 보면 고민과 아픔이 있는 친구다.
“얘, 좋은 생각이 있어. 10년 후 오늘, 그러니까 1986년 10월 24일 정오에 우리 여기서 모두 만나기로 하면 어때?” “그래, 유엔 데이니까 날짜도 외우기 쉽고. 자 약속하자.” p215.
어린 시절 친구들만이 할 수 있는 순수한 미래에 대한 약속... 미래를 함께 꿈꾸는 소녀들의 순수한 열망과 유대감이 드러난다. 나 또한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렸을 때 내기 했던 기억이... 커서 돈 벌면 누가 제일 먼저 차를 사게 될지 두고서...
내가 지난 3년간 살아온 공간, 그 수많은 시간과의 이별을 되살리고 있는데 선형이가 내 곁에 와서 은빛 나는 상자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까 선형이는 묵묵히 눈으로 창밖을 가리켰습니다. 뜻밖에도 창 밖에는 나를 향해 웃는 얼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김 헌수 선수가 나를 향해 흰 이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얼떨결에 나도 그를 향해 웃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고, 반 대표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우리들의 졸업장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별로 그럴듯한 인사도 남기시지 않고는 “어때? 시원섭섭하지?”하고 웃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두 한바탕 웃었습니다. p256.
마야 졸업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대로 죽 잘 자랐다면 지금쯤 넌 뭐가 되어 있을까? 대학교수? 학교 선생님? 공무원? 그것도 아니면 난 확신컨대 넌 작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 따뜻한 글을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 싶다. 60대 할머니는 아니고 60대 아주머니로... 그러고 보니 미안 누나한테 반말해서... 너도 처음에 현태 오빠한테 반말하면서 ‘현태’라고 불렀잖니...
스트리트 선주, 꾸러기 은수, 푸들 지연이, 막내 현숙이, 세단차 선형이, 수다꾼 순정이, 그리고 소공녀 주혜...... 모두 모두 좋은 친구들입니다. 혹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더라도 우리는 계속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함께 있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들이 많을 테니까요. 같이 기뻐하고 같이 화내야 할 일들이, 하나라도 빠져서는 서운한 일들이 우리 사이엔 꽉 찼거든요. p257.
마야의 우정은 계속 자라고 자라서 지금도 친구들 가끔씩 만나지 않을까 싶다. 여중시절 아련했던 추억 떠올리고 나누며... 지금 11월 60대 소녀 마야는 어떤 고독을 씹고 있을까? 아직도 ‘쁘띠 디아블’ 소리만 들어도 가슴 많이 설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