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h und Du-관계
"태초에 '나-너'관계가 있었다"라는 사실을 믿는다.
혹시 내가 누군가를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대하거나 그의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을 바라보지 않는지
끊임없이 살필 일이다. 아래 졸시는 힘든 시기 그 때 적었던 거다.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참을성 없이 고개 쑥 내밀다
술래에게 잘 들키는
5살 꼬맹이처럼
풀잎사이 나뭇잎사이로 빼꼼거리다
발각되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너’라는 존재
낮은 곳보다
높은 곳에서
구름도
장기판의 졸처럼 다루는,
세상을
조물딱조물딱
내 머리카락 내 이마를
살며시 쓸고 지나갈 때는
시원한 듯 따뜻한 듯
엄마 손길
비든 눈이든 나무든
우악스럽게
아무거나 막 집어던질 땐
술취한 아버지의 손찌검
좋아할 수만도
싫어할 수만도
늘 멀리할 수만도
늘 곁에 붙잡아 둘 수만도 없는
‘너’라는 존재
오늘밤
하얗게 차가운 달 속에
잠시
숨고르며
스며들어 있는
‘너’라는 존재
늘 그립고
마주하고 싶고
느끼고 싶고
같이 숨 쉬고 싶은
‘너’라는 존재는
존재를 넘어선
존재 이전의 존재
1. ‘나-너’의 근원어는 오직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나의 전 존재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 녹아지는 것은 나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없이 이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2. 진실로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버젓한 ‘나’가 된다. 내가 ‘나’가 됨에 따라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게 된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다. p29.
1. 전 존재의 투여
"‘나-너’의 근원어는 오직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나의 전 존재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 녹아지는 것은 나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없이 이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전 존재 : '나-너'를 말한다는 것은 나의 이성, 감정, 의지 등 나의 모든 부분을 총동원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지성이나 감정의 일부만을 가지고 대상을 분석하는 '나-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나의 능력 vs. 은총 : 만남은 나의 의지적 노력(전 존재에 정신을 집중)을 요구하지만, 만남 자체가 실현되는 것은 나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상대방의 응답이나 관계의 성립은 '은총'처럼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즉, 나의 의지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뜻이다.
2. 자아의 형성
"진실로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버젓한 ‘나’가 된다. 내가 ‘나’가 됨에 따라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게 된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다."
●관계의 선험성 : 부버 철학의 핵심이다. '나'라는 주체가 이미 존재하고 나서 '너'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참된 '나'가 형성된다.
●자아의 완성: '나-너'의 만남은 고립된 개인을 사회적 존재로 통합하는 행위이며, 이 만남 속에서 나의 정체성이 확인되고 완성된다. 부버에게 있어 참된 삶은 곧 만남(Begegnung) 그 자체이다.
3. ‘너’와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떠한 관념형태도, 어떠한 예비 지식도, 어떠한 공상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4. 회상조차도, 단편적인 상태에서 전체적 통일로 진전함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게 된다.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떠한 의도도, 어떠한 욕망도, 어떠한 예측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갈망마저도 꿈에서 현실로 옮겨질 때에는 그 모습이 변해버린다. 5. 모든 수단이 다 장애물일 뿐이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이 무너질 때에 비로소 ‘나’와 ‘너’의 만남이 실현되는 것이다. p29.
3. 관계의 순수한 직접성
"‘너’와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떠한 관념형태도, 어떠한 예비 지식도, 어떠한 공상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매개물의 거부: '나-그것' 관계는 관념(개념, 카테고리)이나 지식(데이터)을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나-너' 관계에서는 이러한 모든 지적, 심리적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 상대를 이미 알고 있는 '과거의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미래의 공상'으로 채워 넣는 순간, 현재의 너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상의 변형: 심지어 과거의 경험(회상)조차도 '나-너'의 순간에는 파편적인 기억이 아니라 전체적인 통일의 모습으로 새롭게 변형된다.
4. 의도와 욕망의 소멸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떠한 의도도, 어떠한 욕망도, 어떠한 예측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갈망마저도 꿈에서 현실로 옮겨질 때에는 그 모습이 변해버린다."
●목적성의 배제: '나-그것' 관계는 수단적이다. 나는 '그것'을 나의 의도나 욕망(사용, 소유, 이익)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하지만 '나-너' 관계는 그 자체로 목적이다. 내가 너에게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의도를 품는 순간, 그 만남은 이미 '나-그것'으로 변질된다.
5. 모든 수단은 장애물
"모든 수단이 다 장애물일 뿐이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이 무너질 때에 비로소 ‘나’와 ‘너’의 만남이 실현되는 것이다."
●수단의 제거: '관념', '지식', '의도', '욕망', '예측' 등은 모두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부버는 이 모든 '수단'을 '나-너'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규정한다.
●순수한 만남의 실현: 이러한 모든 매개가 완전히 무너져야만, 즉 오직 '나'와 '너'만이 순수하게 마주하는 순간에 비로소 진정한 '나-너'의 만남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위 두 단락은 '나-너' 관계가 얼마나 어렵고 순수한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나-너'는 단순히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아니라, 나의 전 존재를 걸고 상대방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이미 아는 지식이 아닌 새로운 현존으로,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직면하는 전일적(全一的) 대화의 순간을 의미한다.
1. 선율(旋律)은 음(音)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詩)는 낱말만으로 엮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상(彫像)은 선(線)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선율이나 시나 조상을 가지고서 이리저리 따지고 할 때에는 그들의 전체적인 조화는 깨지고, 모두가 다 보잘것없는 조각이 되어 흩어지고 말 것이다. 2. 이 사실은 내가 ‘너’라고 부르는 사람에게도 들어맞는다. 나는 ‘너’인 그 사람의 머리털, 말투 또는 양순한 성격 따위를 끄집어낼 수 있다. 사실 언제나 그렇게 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나에게 ‘너’이기를 그치고 만다. p23~24.
1. 전체성의 파괴
예술 작품의 비유를 통해 '나-너' 관계의 전체성을 설명하고, 이것이 분석되는 순간 파괴됨을 경고한다.
“선율(旋律)은 음(音)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詩)는 낱말만으로 엮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상(彫像)은 선(線)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선율이나 시나 조상을 가지고서 이리저리 따지고 할 때에는 그들의 전체적인 조화는 깨지고, 모두가 다 보잘것없는 조각이 되어 흩어지고 말 것이다.”
●멜로디, 시, 조상: 이들은 단순한 음표, 낱말, 선의 합(Sum)이 아니라, 그 요소들이 합쳐져 만들어내는 유기적인 조화와 전체적인 생명력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분해와 조각화: 우리가 이를 논리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할 때(분석)', 그 조화는 깨지고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며, "보잘것없는 조각"으로 흩어진다.
2.‘너’를 잃는 순간
"이 사실은 내가 ‘너’라고 부르는 사람에게도 들어맞는다. 나는 ‘너’인 그 사람의 머리털, 말투 또는 양순한 성격 따위를 끄집어낼 수 있다. 사실 언제나 그렇게 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나에게 ‘너’이기를 그치고 만다."
●속성의 추출: 내가 '너'를 분석하여 머리털, 말투, 성격 등의 부분적인 속성을 끄집어내는 순간, 나는 '너'를 전체적인 존재(Du)로 대하는 것을 중단한다.
●'그것'으로의 전환: 이 속성들은 나의 지식이나 기억에 저장되는 데이터(Data)가 된다. 이 순간 너는 분석의 대상, 즉 '그것(Es)'으로 전환되며, 너의 살아있는 현존은 사라진다.
3. ‘나-너’의 관계가 종국에 다다르든가 혹은 수단으로 말미암아 혼탁해질 때에 ‘너’는 하나의 대상으로 변하고 만다. 4. 이렇게 대상이 되어버린 ‘너’는 아직도 모든 대상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으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그것은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규범과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대상인 것이다. p39.
3. 관계가 ‘그것’으로 변하는 두 가지 경로
“‘나-너’의 관계가 종국에 다다르든가 혹은 수단으로 말미암아 혼탁해질 때에 ‘너’는 하나의 대상으로 변하고 만다.”
●종국에 다다를 때 (자연스러운 종료): '나-너'의 만남은 찰나적이며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황홀한 만남의 순간이 지나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경험으로 남고 대상화된다.
●수단으로 말미암아 혼탁해질 때 (의도적 파괴): 내가 '너'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수단)나 욕망을 개입시키는 순간, 관계는 오염되고 '나-그것'으로 변질된다.
4. 대상화의 최종 단계
"이렇게 대상이 되어버린 ‘너’는 아직도 모든 대상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으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그것은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규범과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대상인 것이다."
●으뜸 대상: 이전에 '너'였던 대상은 나에게 여전히 가장 소중한 기억이나 가치를 지닌 '으뜸' 대상일 수 있다 (예: 영원히 잊지 못할 첫사랑의 추억).
●규범과 법칙의 지배: 그러나 일단 대상이 되어버린 이상, 그것은 더 이상 자유롭고 생생한 '너'가 아니다. 이제 그 대상은 범주화되고 예측가능성을 지닌다.
○범주화: 일반적인 규범과 법칙 (예: 사회학적 분류, 심리학적 진단, 물리적 속성)에 의해 분석되고 규정된
다.
○예측 가능성: 과거의 지식에 의해 통제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위 두 단락은 '나-너'의 만남은 본질적으로 전체적이고 직접적이며, '나-그것'의 경험은 본질적으로 분석적이고 간접적임을 보여준다. 부버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그것'의 세계를 필요로 하면서도, 분석과 수단화를 통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비극을 경고하며, 깨어진 조화를 회복하고 다시 '너'를 만날 것을 촉구한다.
1.첫째 근원어인 ‘나-너’도 ‘나’와 ‘너’라는 두 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근원어는 ‘나’와 ‘너’라는 두 요소가 한데 합쳐져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나’라는 것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2. 이와는 반대로, 둘째 근원어인 ‘나-그것’은 ‘나’와 ‘그것’이 얽힌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본질상 ‘그것’은 ‘나’보다는 뒤에 나타난다. p48.
1. 근원어 '나-너': 창조되지 않은 선험적 근원
"첫째 근원어인 ‘나-너’도 ‘나’와 ‘너’라는 두 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근원어는 ‘나’와 ‘너’라는 두 요소가 한데 합쳐져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나’라는 것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분해 가능성 (언어적 측면): 문법적으로 '나-너'는 '나'와 '너'로 나눌 수 있다.
●합성의 부정 (존재론적 측면): 그러나 '나-너' 관계 자체는 '나'라는 주체와 '너'라는 객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나'와 '너'가 이미 완성된 채 존재했고, 그 후에 관계를 맺었다는 통념을 부정한다.
●'나' 이전의 존재: '나-너' 관계는 '나'라는 자아가 독립적으로 확립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즉, 관계(Relation)는 개별적인 자아(I)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래적이다. 부버가 말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2. 근원어 '나-그것': '나'로부터 파생된 결과물
"이와는 반대로, 둘째 근원어인 ‘나-그것’은 ‘나’와 ‘그것’이 얽힌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본질상 ‘그것’은 ‘나’보다는 뒤에 나타난다."
●합성된 결과: '나-그것' 관계는 '나'와 '그것'이라는 두 분리된 요소가 합쳐지거나 얽혀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는 '나-그것'이 분석적 행위의 결과물임을 시사한다.
●'나'의 우선순위: '나-그것'의 세계가 성립하려면, 분리된 '나(주체)'가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이 '나'가 세상을 대상화하고 지식으로 소유하려 할 때, 비로소 '그것(객체)'이 나중에 나타난다.
따라서 ‘나-너’ => ‘나’ => ‘그것’ 의 순서가 성립한다.
1.사랑은 결코 ‘나’에게 달라붙어서 ‘너’마저 자기의 내용이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려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와 ‘너’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 p34~35.
1. 사랑은 '나'와 '너'의 '사이'에 있다
●감정의 부정이 아닌 위치의 규정: 부버에게 사랑은 '나'라는 주체 안에 갇혀서 대상을 소유하려 하거나 '너'를 자기의 내용이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려는 감정이 아니다.
●'사이'의 존재: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영역, 즉 관계 그 자체이다. 이는 사랑이 주체의 주관적인 상태가 아니라, 두 존재 간에 발생하는 객관적인 사건임을 의미한다.
2.진실로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을 바라볼 때에는 사람은 그 하나하나가 자유롭고 유일무이한 존재요, 또한 하나의 ‘너’가 되어 내 앞에 어엿이 서 있는 인격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할 때 ‘나-너’의 관계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특이한 독존성이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때에라야 비로소 사람은 남을 돕고, 고치고, 가르치고, 높이고, 건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을 의미한다고 하겠다.p35.
2. 사랑은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이다
●자유롭고 유일무이한 존재: 사랑의 시선은 상대를 분석하거나 규정하지 않으며, 그 사람을 자유롭고 유일무이한 존재('너')로 온전히 받아들인다.
●독존성(獨存性)의 신비: 오직 '나-너' 관계만이 가질 수 있는 이 특이한 독존성이 나타날 때, 상대를 진정으로 돕고 변화시킬 수 있는 참된 행위가 가능해진다.
●책임: 따라서 사랑은 단순한 기쁨이나 충족의 감정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를 온전히 살아가도록 돕는 '나'의 책임이자 관계에 대한 응답을 의미한다.
3. -“사랑은 맹목적이다.”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사랑이 맹목적인 동안에는-즉 사랑이 상대편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동안에는-사랑은 아직도 근원어 ‘나-너’의 지배하에 서 있지 않다. 4. 미움은 원래가 ‘맹목적’인 것이다. 상대편의 부분밖에 보지 못할 때에만 미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전체를 보는 사람은, 비록 그가 전체를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미움의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다. p37~38.
3. 사랑과 맹목성의 관계
“-“사랑은 맹목적이다.”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사랑이 맹목적인 동안에는-즉 사랑이 상대편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동안에는-사랑은 아직도 근원어 ‘나-너’의 지배하에 서 있지 않다.”
●통념의 부정: 부버는 흔히 말하는 '맹목적인 사랑'을 부정한다.
●부분적 인식의 한계: 사랑이 맹목적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단점이나 부정적인 면을 외면하는, 즉 상대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부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나-너'의 미도달: 따라서 그러한 맹목적인 사랑은 '나-너' 관계의 온전함에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이며, 불완전하고 미숙한 감정일 뿐입니다. 참된 사랑('나-너')은 상대를 전체로서 명료하게 응시한다.
4. 미움의 본질은 맹목성
"미움은 원래가 ‘맹목적’인 것이다. 상대편의 부분밖에 보지 못할 때에만 미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맹목성의 귀속: 부버는 맹목성이야말로 미움의 본질이라고 단언한다.
●부분화의 결과: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존재 전체가 아닌, 그의 특정 부분(결점, 잘못된 행위 등)만을 분리하여 대상화할 때 가능하다. 미움은 상대를 조각내어 그 단점만을 확대하는 '나-그것(Ich-Es)'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5. 전체를 보는 시선과 미움의 세계
"그러나 전체를 보는 사람은, 비록 그가 전체를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미움의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다."
●전체성의 통찰: '전체를 보는 사람'은 상대를 '나-너'의 시선으로 온전히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는 상대의 단점과 문제점까지 포함한 총체적인 존재를 인식한다.
●거부와 미움의 분리: 우리는 상대의 전체를 알면서도 그의 특정 행위나 성향을 윤리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거부하거나 멀리할 수 있다.
●미움의 초월: 그러나 그 거부는 상대를 조각내어 증오하는 맹목적인 미움이 아니다. 전체를 보는 시선은 상대를 인간 존재로서 존중하는 바탕을 유지하기 때문에, 파괴적인 미움의 영역에서는 벗어나 있다.
부버에게 참된 사랑은 명료함(전체를 봄)이며, 미움은 맹목성(부분만 봄)이다. 미움이 상대를 부분화하여 객체(그것)로 만들 때 생겨나는 파괴적인 감정이라면, 사랑은 상대를 전체(너)로서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명료한 관계의 행위이다.
사랑은 둘이서 하나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둘이서 각각 서로를 온전한 '너'로 인정해 주고 진정한 '나-너' 관계를 타이트하게 유지할 때 가능하다. '나-너'관계도 쉽지 않은 데 그 절정에 있는 사랑을 한다는 것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