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3

Ich und Du-관계

by 행복이

나와 너 3



"(그림자)"


흐리고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조용히 숨어버리는 "너"


맑게 개인 날

슬그머니

내게 웃으며 다가와

보고싶지 않았냐며 묻곤,

기어이 보고싶었다는

나의 대답을 듣고서야

어제는 하루종일 우울해서

도저히 나올 수 없었다 한다


정작 비오는 날

난 "너"를 더욱 원하는데




자유, 운명, 그리고 ‘나’의 두 얼굴에 대하여

부버는 제2부 인간의 세계 후반부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것’의 세계와 인과율에 얽매이면서도 동시에 그 굴레를 넘어서는 존재로 남아 있는지를 탐구한다. 인과율은 자연을 질서 있게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지만,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짐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오직 ‘나-너’ 관계 속에서 인과율을 뛰어넘는 완전히 자유로운 행위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유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교가 아니라, ‘너’의 면전에서 결단 내리는 존재의 용기다. 그래서 부버는 진짜 악마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가 아니라, 평생 결단을 회피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 결단의 순간, 자유운명과 마주친다. 부버에게서 운명은 인간을 구속하는 족쇄가 아니라, 자유로운 행위에 응답해 다가오는 존재의 성취다. 자유운명이 서로 얽혀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과거의 세계에서 운명은 하늘의 질서와 조화롭게 공존했지만, 정신이 쇠퇴한 시대에는 인과율이 비대해져 인간을 압박하는 숙명처럼 변한다. ‘코스모스’가 주던 광명은 사라지고, 인간은 더 이상 의미의 세계가 아닌 폐쇄된 기계적 우주 속에서 숨 막혀 한다. 부버는 이런 시대를 정신이 병든 시대’라고 부르며, ‘그것’의 세계가 본래의 생명 흐름을 잃어 시궁창처럼 부패한 구조로 전락한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문화를 다시 정의하는 부버의 통찰이 빛난다. 문화는 제도와 성취의 누적이 아니라, ‘너’에게 응답하는 정신본질적 행위에서 탄생한 흐름이다. ‘너’와의 만남이 끊길 때 문화는 즉시 ‘그것’의 세계로 굴러떨어지고, 살아 있는 생명력을 잃는다. 그래서 오늘날의 개인이 순간적으로나마 ‘그것’을 뚫고 나오는 방식은 극도로 고독한 정신의 폭발적 행위뿐이다. 만남 없는 시대에 창조는 찰나적 저항으로만 남는다.


부버는 이어 인간 내면의 두 ‘나’를 극적으로 대비한다.

‘나-그것’의 ‘나’는 고립된 개아(個我)로서 스스로를 대상들과 비교해 이해하며, 경험하고 이용하기 위해 세계를 분절한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능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생의 운동이다. 반면 ‘나-너’의 ‘나’인격으로서 자기 존재를 관계 속에서 드러낸다. 이 ‘나’는 어떤 대상적 속성도 붙지 않은 순수한 주체성이며, 다른 존재와 마주할 때 비로소 현존한다. 인간이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은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혼자서만 가지는 세계에는 현실이 없다. 현실은 언제나 ‘너’와 함께 나누는 공유된 장(場)에서 열린다.


그렇기 때문에 부버는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두 층위로 나눠 해석한다. 개아에게는 “너의 특수한 상태를 알라”가 되지만, 인격에게는 “너의 존재를 알라”가 된다. 전자분리의 운동이고, 후자결합의 운동이다. 그리고 어떤 ‘나’가 말해지고 있는지를 듣는 일—바로 그것이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부버는 말한다.


이 지점에서 부버는 소크라테스괴테를 예로 들어 ‘나-너’의 ‘나’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나’는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사람들과의 현실적 만남을 향해 열린 존재였다. 심판대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그는 ‘다이모니온’이 그에게 던지는 “너여!”라는 부름을 들었다. 괴테의 ‘나’는 자연과의 순수한 사귐 속에서 존재했고, 장미꽃조차 ‘너’로 만나는 투명한 시선을 지녔다. 그들의 ‘나’충만하고, 진실하며, 청순한 울림을 가진다. 그 ‘나’는 실제로 관계하고 있는 ‘너’의 빛을 머금은 존재다.


반대로 부버는 나폴레옹의 ‘나’를 철저히 해부한다. 나폴레옹은 타인을 모두 동력기처럼 보았고,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거대한 기계처럼 대했다. 그의 ‘나’는 천상에서 떨어져 나온 단단한 점(點)처럼, 오직 명령을 위한 문법적 주어일 뿐이었다. 그는 결국 “나는 시계이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나’는 절대적 고립 속에서 점점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어가다가, 결국 심연으로 사라져버린다. 부버의 관점에서 나폴레옹의 ‘나’ ‘너’을 잃어버린 주체의 숙명적 파멸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다.


이 모든 사유를 통해 부버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자유인현실을 믿는 사람이다.

즉, ‘나’와 ‘너’라는 두 실재가 참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다. 자유인운명을 믿는다. 그러나 그 운명은 그를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다가가 주기를 기다리는 살아 있는 응답이다. 그래서 자유인은 목적을 세우지 않는다. 오직 한 가지, 다시 만남으로 향해 나아가려는 결단만을 품고 산다. 그 결단이 실패할 때조차, 바로 그 무너짐 속에서 진짜 만남이 시작된다.


부버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이 된다.

‘나-너’만남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삶을 현실로 만든다.


‘그것’의 세계는 필요하지만, 그 세계에 갇힌 인간은 숙명에 짓눌리고 자기 존재를 잃는다.

반면, ‘너’를 향해 결단하는 인간은 운명과 더불어 살아가며 자유를 얻는다.


부버는 말한다.

"만남이 없다면 현실도, 자유도, 문화도 없다.“


그의 사유는 오늘날 인간관계가 소모되고, ‘사용 가능한 것’만 가치로 평가되는 시대에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에 머물고 있는가?

‘그것’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은가?

누군가를 향해 다시 ‘너’를 말할 결단을 하고 있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끝까지 붙잡게 만드는 철학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나와 너"는 여기서 마감하려고 한다. 제3부 '영원자 너'는 생략하기로 한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인간관계에서 항상 '나-너'로 시작한다는 것은 항상 '믿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그것'으로 대하면

결국 나도 '그것'으로 대접 받을 것임을 명심하고 사람들을 대해야겠다.


나와 너를 찾는 여행은 아무래도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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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를 찾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