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난 지 32시간이 걸려 피지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간으로 저녁 8시 정도에 도착했기에 나와보니 밖은 깜깜했다. 원래 비행일정 대로였다면 오늘 새벽 5시에 도착했을 테고 그랬다면 미국에서 날아온 미국팀 리더 J를 공항에서 만나 함께 숙소로 이동할 수 있었는데, 내 일정들이 모두 바뀌어 J에게 먼저 숙소로 가 있으라 했다. 첫날 숙소는 공항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의 호텔이라 택시로 이동해야 했다. 밖으로 나가니 영어를 곧 잘하는 피지 택시기사 'Bula(안녕하세요)'라고 외치며 나를 불렀다. 으레 해야 하는 수준의 가격 흥정 후에 올라탔다. 택시기사는 왜 피지에 온 건지, 무슨 일을 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피지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믿는지, 또 주요 산업은 사탕수수와 관광업이라던지 하는 정보들을 끊임없이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던 중에 갑자기 기사는 급정거를 하며 비상등을 켰다.
창문 밖을 보니 야생말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마치 사파리에 온 것처럼 기사는 아예 차를 세워주며 그들을 카메라에 담을 시간을 주었다. 거의 도착할 때가 되자 기사는 자신의 가이드가 어땠냐며 감동한 만큼 택시비를 더 주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지만 택시기사뿐 아니라 관광가이드 역할까지 해낸, 내가 처음 만난 피지사람에게 야박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10 정도를 더 내밀었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Are you happy, too?'라고 내게 물었다. 'Yes, Vinaka(감사합니다)'라고 그들의 언어로 답을 하니 그는 건치를 뽐내며 웃었다.
J에게 도착했다고 메세지를 보내고 프론데스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동안 마주친 모든 호텔에서 일하는 피지사람들은 'Bula'라고 내게 인사하며 밝게 웃어주었다. 맑은 미소들이었다. 피지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오래 지내면 모두가 자연스레 지늬게 되는 그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모두의 미소에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32시간의 비행과 대기로 지친 몸이었지만 선선한 바람과 적당한 습도, 피지사람들의 미소로 모두 잊혔다. 내가 살면서 피지라는 나라에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참 재밌는 일이다 하는 생각을 하던 중에 J가 나타났다.
J는 올해 초 CES에서 우리 브랜드를 도와줬던 친구다.
한국사람의 얼굴이지만 국적부터 언어,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까지 모두 미국사람이다. CES 때 우리 부스를 찾아온 바이어와 참관객들에게 SUMSEI를 소개하는데, 그저 제품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철학과 Why부터 설명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그 또한 CES까지 와서 부스에 브랜드 이름은 안 걸고 나무 한 그루 떡하니 심어둔 브랜드가 인상 깊었다고 했다. 물리적으로 미국에서 브랜드를 전개할 수 없었던 나는 CES 행사를 마치고 라스베가스의 마지막날 밤, J에게 미국에서의 브랜드 전개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에 그는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조지아 주로 돌아가 하고 있던 프로젝트들을 정리하고 나의 제안을 받아 주었다. 그렇게 2월부터 함께하여 어느덧 우리는 10개월을 함께 해오던 중이었다. 줌미팅으로 매주 함께 했지만 실제 얼굴을 마주한 건 CES 행사 이후로 처음이었다.
숙소로 들어와 룸서비스로 늦은 저녁을 시키고 서로의 근황과 지난 10개월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32시간을 걸려 도착해서 피곤할 법도 한데 이번 출장에서 얻어야 하는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자정을 한참 넘기고서야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걷어보니 그제야 피지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파랗다 못해 초록한 바닷물 색과 거대한 야자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식을 먹으러 가는 길에 피지워터를 박스채로 실어 나르는 트럭과 마주하니, 나 진짜 피지에 왔구나 싶었다.
피지에 온 이유는 스파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CES에서 황당한 우리의 부스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다녀간 바이어와 참관객들은 너무나도 광범위했다. 한국에서 온 작은 브랜드를 알리기에 미국 시장은 너무나도 광활했다. 미국팀으로 합류한 J가 가장 먼저 하고 싶어 한 일은 우리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를 표현하는 WHY를 명문화하는 것이었다. 매출전략은 어떻게, 파트너십은 어떻게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의 WHY와 HOW를 명확히 해야만 한다고 고집했다. 당시에는 이 부분에 너무나도 고집스러웠던 J에 대해 불만을 가진 멤버가 우리 팀 내부에 생길 정도로 처음 한 두 달을 이 일에 몰두했었다. 결국에 정리해 낸 우리의 WHY는 '인간을 더 인간답게 살게 하자'였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여러 방식 중에 하나로 우리의 HOW를 'NATURE ANYTIME ANYWHERE (자연을 언제 어디서나)'로 정했다.
그러자 우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가 명확히 보였다.
우리의 WHY인 '인간을 더 인간답게 살게 하자'가 곧 Wellness라는 개념으로 연결됐다. Wellness를 가장 높은 화두로 두고 있는 산업을 살펴보니 스파 시장이었다. 먹고사는 욕구를 어느 정도 해결한 사람들이 보다 인간답게 살아보고자 자신에게 투자를 하는 시장이었다. 워낙 럭셔리 시장이기에 시장규모 자체로는 크지 않을 수 있었지만 뾰족하게 파고 들어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기회로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 스파시장의 가장 영향력 있는 플레이어들이 모이는 컨퍼런스로 향했다. 그곳이 바로 LiveLoveSpa였다. 그들은 미국의 각 주에서 한 달에 1-2회 정도 컨퍼런스를 열고 바이어(스파 디렉터 또는 5성급 호텔 디렉터)와 스파산업의 브랜드들을 한 자리에 모아 교류하는 자리를 10년 넘게 운영해 오고 있었다. 처음에 LiveLoveSpa는 이미 모든 컨퍼런스가 풀부킹이어서 연말에 있는 행사 하나에만 참여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으나, J가 줌미팅을 통해 SUMSEI의 철학과 제품들을 소개하니 꾸역꾸역 자리를 내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J는 8월에 LA, 9월에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두 번의 컨퍼런스에 SUMSEI를 들고 참여했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디드라이어라는 컨셉에 5성급 호텔과 럭셔리 스파의 디렉터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미국에 진출하면 파트너십을 맺고 싶었던 호텔보다 더 이름값이 높은 호텔과 스파들이 연결됐다. 당장 세일즈로 연결되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콧대 높은 그들이 우호적인 제스처들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시그니엘 호텔과의 파트너십을 시작으로 소비자들에게 우리를 알렸던 것처럼, 그 그림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이 모든 상황들을 J를 통해 업데이트 받았지만 피지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는 직접 참여해 현장에서 그 분위기와 반응들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온 피지였다. 근데 마침 내가 참석하기로 한 피지 컨퍼런스는 LiveLoveSpa가 운영하는 컨퍼런스 중 가장 큰, 일 년에 한 번 있는 이벤트라고 했다. 그만큼 참석한 바이어와 브랜드들의 퀄리티도 높고 컨퍼런스 기간도 4박으로 길다고 했다. 그 4박 5일의 기간 중 공식적으로 브랜드와 제품을 소개하는 시간은 둘째 날에 세 시간 반 정도만 주어지고 그 외는 계속해서 짜여진 프로그램들을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네트워킹을 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컨퍼런스의 첫 프로그램은 해변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을 차려입고 칵테일과 함께 스탠딩으로 네트워킹하는 시간이었다. 허허. 이렇게 시작한다고?.. 참으로 미국스러운 행사의 시작이었다.
Wellness가 주제인만큼 다음 날 아침은 요가 세션으로 시작했다. 오전 시간에는 스파 산업의 트렌드에 대해서 4명의 패널이 나와 사회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행사 중간에 J는 나를 찾아와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곧 이어지는 오후 시간의 첫 프로그램은 4박 5일의 행사 중에 딱 한번 주어지는 제품을 소개하는 쇼케이스인데, 한국에서 보낸 박스들이 공항에서 잡혀 호텔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이틀 전에는 도착하도록 한국에서 팀이 일정에 맞춰 보냈던 박스인데 행사 시작일을 넘겨 결국 쇼케이스까지도 도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쇼케이스만을 기다렸을 J였기에 흔들릴 법했지만 그는 오히려 침착해 보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국에서 박스를 보낸 멤버를 원망한다한들,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한들 변하는 건 없을 테니 플랜 B로 가자고 했다. 그 시간 참여한 모든 브랜드들이 부스를 제품들로 꾸미기 시작했다. 우리는 꺼내 놓을 제품이 하나도 없었기에 J의 랩탑에 멀티 모니터를 연결하여 세팅을 마쳤다.
그렇게 시작된 쇼케이스. 호텔과 스파의 디렉터들이 컨퍼런스룸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우리 부스 앞에 멈춰 서서는 달랑 모니터만 올려져 있는 것을 보며 무슨 브랜드이냐고 물었다. J는 자연스럽게 당신의 상상력을 잠시 빌릴 수 있겠냐는 멘트를 시작으로,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살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Why와 이를 위해 기술을 융합하여 자연을 언제 어디서냐 경험할 수 있게 하려는 미션을 나누기 시작했다. What 인 우리의 제품을 설명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모니터와 제품소개서의 사진들에 상상력을 더하여 에어샤워의 바람을 느끼게 했다. 제품 하나 없는 부스였지만 방문한 담당자들의 눈빛을 통해 J가 풀어내는 우리 브랜드 스토리와 제품에 그들이 몰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흥미롭게 우리 브랜드의 철학과 제품들을 마주한 디렉터들의 소속은 처음 미국시장에 진출하면서 제휴하고 싶었던 호텔과 스파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곳들이었다. 디렉터 직급들이 참여하는 컨퍼런스이기에 대부분 업계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갖춘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런 5성급 호텔에서 서비스를 적지 않은 시간 제공해 온 그들이 설득되고 있다는 건 충분히 고무적이었다. J가 이전의 컨퍼런스에서 체감했다는 그 반응들이 무엇이었는지 나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 우리 브랜드 자체가 그들을 흥미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K spa와 K consmetic 은 이미 미국의 이 업계에서도 레퍼런스가 되는 선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시작한 브랜드라는 것도 적지 않은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었다. 심지어 컨퍼런스의 다른 프로그램 때에는 심심치 않게 K pop 음악들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종종 바이어들은 브랜드가 아닌 한국사람인 나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했다. 분명한 기회였다.
또한 그곳에 모인 호텔과 스파 산업의 리더들의 메인 키워드는 시종일관 Wellness였다. 그런 Wellness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 그들이 그들 입으로 자연을 반복해서 꺼냈다. 자연을 어떻게 더 그들의 공간과 서비스에 들일 수 있을지가 컨퍼런스 내내 오고 갔다. 그런 그들이 도착한 우리 부스에는 제품은 없었지만, ‘Wellness’가 있었고 우리는 '자연'을 다루고 있었다. 그들이 보인 관심은 단순히 신기해서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제품과 이야기를 우리가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주가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싶게도 이틀 뒤에 한번 더 쇼케이스 시간이 마련됐다. 바이어들이 시간 관계상 모든 브랜드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다고 하여 다시 생긴 시간이었다. 마침 그 사이에 공항에서 걸려 있던 우리 제품들은 쇼케이스 행사장으로 도착했고, 드디어 우리의 What을 선보일 수 있었다. 특히 이때는 바이어뿐 아니라 이번 전체 행사 프로그램 중간중간에 마련된 강연자, 키노트 사회자, 명상 전문가도 우리 부스를 먼저 찾아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것저것들을 물었고 함께 협업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지를 확인했다.
이번 피지 행사를 통해, 한국에서는 이미 6년 차인 브랜드가 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이제 시작인 아주 작은 신생 브랜드인 게 우리의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6년 전,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컨셉을 설득시키기 위해 시그니엘과의 파트너십을 고민하고 시도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소비자를 내가 직접 설득할 자신은 없었기에 나를 대신해 소비자를 설득해 줄 압도적인 파트너를 갖추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었다. 결국 시그니엘을 통해 우리 제품을 소개할 수 있었고 지금은 호텔, 골프장, 스테이, 헬스장 등 탄탄한 파트너십을 통해 우리의 가치를 전하고 있고, 전해진 가치만큼이 매출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6년이 지나 그 일을 미국시장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고무적인 것은 미국의 호텔과 스파 업계의 리딩 브랜드들과의 파트너십이 가질 영향력은 단순 미국시장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갈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도력을 가지고 업계를 이끌고 있는 미국 시장의 탑 플레이어들을 통해 우리의 철학과 제품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막연함과 두려움이 왜 없겠냐만은, 있었던 시장이 아니라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세계 시장을 이끄는 일류 브랜드가 되어 볼 수 있는 작은 가능성에 이미 나는 설렌다. 아주 작은 그 가능성을 나는 이곳 피지에서 보았다.
BTS, 봉준호, 손흥민, 한강, 그다음에 섬세이가 이름을 올리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