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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감

조르바 붓다

Osho Rajneesh

by 혁이창

나의 혁명, 나의 새로운 인간은 조르바 붓다이다.

조르바처럼 세속의 기쁨을 누릴 줄 알며 동시에, 붓다처럼 침묵의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사람, 그가 조르바 붓다이다.


조르바는 장님이다. 그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춤추고 노래할 줄 안다. 그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안다.


붓다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저 볼 뿐이다. 그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순수한 눈을 갖고 있지만 춤추는 재주가 없다. 그는 노래할 줄 모른다. 이 삶을 즐기는 법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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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지근한 삶을 살지 말라

삶에 안전한 것이 있는가? 안전은 인간이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안전이 존재한단 말인가?


언제라도 죽음이 그대를 덮칠 수 있다. 죽음의 전령은 언제나 예고 없이 그대를 찾아온다.

안전을 바라지 말라. 불안전함 속에 살아라. 그것이 삶의 실재적인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피하거나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여유 있는 자세로 삶을 대하라. 동요하지 말라. 강한 정신력과 용기를 갖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라. 즐거운 마음으로 춤추며 기꺼이 어둠을 향해 나아가라. 그대는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오히려 그대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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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그의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빛이다. 평화는 그의 향기이며 조화로운 가슴이다. 그에게 평화는 이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황제인 그대는 왜 세계를 정복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그대는 마치 평화롭게 쉬고 명상과 침묵 속에 아침의 태양과 산들바람을 즐기기 위해서 먼저 세계를 정복해야만 되는 것처럼 말한다. 평화가 그렇게 힘든 것인가? 아무것도 정복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은 쉴 수 없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이미 쉬고 있다. 나는 평화롭다. 나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상하다. 거의 미친 것처럼 보인다. 그대의 욕망과 염원, 야망을 관찰해 보라. 그러면 평화를 방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평화는 그대의 본성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그대는 완벽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떨쳐 버리기만 하면 된다. 평화를 달성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 점을 명심하라. 평화는 이미 그대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대는 평화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졌다.


분노, 질투, 탐욕, 야망은 가치 없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그대는 무진장한 축복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 그 어리석음을 떨쳐버려라.


다만 더 깨어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라. 더 깨어 있을수록 그대의 내면에 더 많은 평화가 자리 잡을 것이다. 그대는 평화를 찾으려고 온 세상을 헤맨다. 그러나 평화는 그대의 내면에 있다. 그곳이 평화로 충만한 그대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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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사회를 등진 사람들은 도망자일 뿐이다. 세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짊어질 책임을 포기한 것이다. 책임을 포기하는 순간, 자유 또한 사라진다. 자유와 책임은 항상 함께 한다. 더 많은 자유를 원한다면 더 많은 책임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가는 상황은 회피다. 히말라야의 동굴 속에서는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명심하라. 책임 없이는 성장도 불가능하다. 그대의 의식이 정체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사회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 사회에 의해 강요된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것이 진정한 포기이다. 그는 자기만의 자율적인 의식에 따른다. 이것은 엄청난 성장의 기회를 안겨준다. 그런 삶은 그에게 존엄성과 기품을 선사한다. 그는 전사이다. 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계명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에 복종한다. 그가 처한 상황은 역동적이다. 그는 사회 속에 남아 매순간 투쟁한다.


그는 삶을 긍정한다. 그렇게 즐거움과 행복으로 충만한 삶을 살 때, 별과 하늘의 고요함이 그대에게 전해진다. 이 존재계와 더불어 평화로움에 잠길 때, 신비의 문이 열린다. 그 외에 깨달음을 얻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 깊은 경외심을 지닌다. 그는 모든 것에 감사한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은 누군가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본성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기쁨과 축복에서 나온다. 새는 의무감으로 노래하지 않는다. 새들은 그저 태양과 더불어, 나무와 친구가 되어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이 존재계는 끊임없는 축제의 장이다.


그는 존재계와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는 존재계에 감응한다. 존재계가 그의 사원이며 경전이다. 이 존재계가 그의 철학이다. 그는 나무, 강, 산과 평화롭게 어울린다. 그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의 가슴 속에는 커다란 존경과 감사함이 깃들어 있다. 이 감사함이 단 하나의 진정한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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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조화로운 삶이 곧 종교이다. 그는 이 삶을 음악으로 만든다. 그는 이 삶을 춤과 축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자연스럽고 이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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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잡다한 군중들로부터 개인을 이끌어 내는 것,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개성과 존엄성을 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모든 아이는 하나의 개인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개인으로 죽는 사람은 드물다. 그대는 태어날 때와 똑같은 순진무구함, 똑같은 전체성, 똑같은 개체성을 갖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것이 그대를 위한 나의 일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그대는 깨어 있는 의식으로 춤추어야 한다.


이 일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구속에서 해방 시키는 것, 어두운 방에 갇힌 사람들을 수갑과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빛의 세계로 끌어내는 것, 그래서 그들이 이 지구와 하늘, 존재계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는 것, 이것이 나의 기쁨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명상가가 될 것을 가르친다. 홀로 있음을 즐길 수 있는 사람, 군중에 속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보상이나 명예, 또는 존경과 특권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는 사람.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이런 사람들의 명예와 특권은 그들 자신의 존재 내부에 있다. 자유와 침묵, 사랑과 창조적 행위 안에 그들의 명예가 있다.


그들의 삶은 그들 자신 안에서 솟아난다. 그런 삶은 대지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친다. 그런 삶에는 별을 향해 비상하려는 열망이 있다. 그런 사람만이 아름답고 우아하다. 오로지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기회를 준 존재계의 열망을 충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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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지구에 태어난 최초의 인물인 것처럼, 두려움 없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라. 그는 자신의 길, 자신의 존엄성, 자신의 자유를 발견하기 위하여 군중들로부터 뛰쳐나와 사자처럼 홀로 우뚝 선다.


그대는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내려면 수많은 군중들이 떠드는 소리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 그대에겐 침묵에서 우러나오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대 안에 주입된 수많은 목소리들 중에서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먼저 그 수많은 소음들을 제거해야 한다. 침묵과 평화에 잠겨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대 안에서 솟아나고 성장한 것, 그대 안에서 피어난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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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미리 정해진 길이 없다. 그는 걸으면서 길을 만든다. 그는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 하늘에는 길이 없다. 하늘에는 새들의 선조가 남긴 발자취가 없다. 어떤 새도 하늘에 발자국을 남겨 놓지 않는다. 그렇게 하늘은 항상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새는 하늘을 날아가면서 자신의 길을 만든다.


그대에게 기쁨을 주는 길을 찾아라. 가슴 속의 소리를 들어라.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는 그대 자신이다.


중용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양극단 모두를 포용한다. 그는 중간에 서 있지만 활짝 편 그의 날개는 양극단까지 닿아 있다. 그의 삶은 전체를 포괄한다. 중용의 아름다움은 전체성에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에서 나는 중용의 길을 반대한다. 극단적인 길에는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중용의 길을 걷는 사람의 삶은 항상 미적지근하다. 그는 조심성이 많다. 극단에는 전체성이 없지만 강렬함이 있다. 그렇기에 정열적인 삶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극단적인 삶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대는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이 독자성을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독자성은 그대의 존재 자체이다.


남들과 동등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꽃들, 다양한 색채들, 다양한 맛, 이런 것들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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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대 안에서 조르바와 붓다를 보게 하라. 그러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그대를 보고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할 것이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풍요로운 사람이 되어라. 대지에 깊이 뿌리박는 동시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올라라. 물질과 의식의 차원을 둘 다 겸비하라. 그러면 그대와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도전의식에 불타 흥미진진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보내는 초청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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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삶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며 결국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아무것도 그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 없다. 아무것도 그를 타협하게 할 수 없다. 그렇게 찰나적인 삶인데 왜 구차스럽게 타협을 하겠는가? 누구에게나 죽음이 확실한데 타협할 필요가 있는가?


이 삶은 너무나 짧다. 그는 창조하면서 즐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고, 그 창조적인 일을 위해 없애야 할 것이 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파괴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가 무엇인가 파괴하는 것은 항상 창조를 위한 일이다.


그는 항상 유쾌하고 활력에 넘친다. 그 유쾌함에서 창조성이 나온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심각함은 구시대적 인간의 특성이다.


삶을 아름다운 농담처럼 대하라.

이 삶에는 심각할 것이 없다.

눈먼 사람들만이 심각하다.

눈을 가진 사람은 심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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