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본명도 알고, 심지어 그들의 얼굴도 구분할 수 있다.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돌 그룹이라서 멤버들의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아는 게 뭐 대단한 일이냐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자랑이 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한때는 나도 떼 지어 나오는 그룹들 멤버 하나하나를 다 알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그때는 딱히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졌던 거 같다. 친구들과의 대화, 좋아하는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반복적으로 듣고 보았기 때문이다. 굳이 안다 모른다를 말할 거리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새 새로 나오는 아이돌들의 나이가 나와 비슷해지더니 어느덧 나보다 어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직장인 대열에 동참하고, 결혼을 하고 육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부터 전부 그 그룹이 그 그룹 같아지기 시작했다. 알면 좋아하고 좋아지면 더 알아가는.. 이런 선순환과는 반대로, 점점 모르는 아이돌들이 많아지고 그러니 관심이 멀어지고, 그러니 더 모르게 되고, 그러니 더 멀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TV 가요 프로그램 대신 챙겨봐야 할 업무 서류가, 공과금 고지서가, 집안 대소사가, 경제 현안이, 부동산 정책이, 아이들의 알림장이 그 우선순위를 앞지르게 된다.
최소 한 달에 한 번씩 업데이트하던 플레이리스트는 분기에 한 번씩 업데이트되다가 급기야 이제는 2014년에 멈춰있다. 여전히 멋진 박서준 씨가 풋풋했던 시절에 부른 마녀의 연애 OST '내 맘에 들어와'가 최애 곡이 된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지금도 자전거를 탈 때면 나는 20대 초반 박서준 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힐링타임을 갖는다.
입사 초기 주니어 시절에는 회식 후 2차로 노래방을 가면 다들 왜 이렇게 옛날 노래만 부르는건지..
당시 최신곡만 부르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너무도 잘 안다.
그분들도 10년 전 플레이리스트에서 멈춰버린 탓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공감이라는 감정으로 과거와 조우하는 순간이 많아지는 게 나이먹음이 아닐까 싶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다!!라는 말을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그 때도 지금도.. 내 마음의 원 픽..
지금이야 해탈의 마음가짐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처음엔 이렇게 덤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마와 같이 TV를 보다가 엄마가 "쟤는 누구냐?"라고 물으시는 말에 바로 대답이 안 나오는 일이 한두 번씩 반복될 때마다 느꼈던 그 심산한 기분이 아직도 기억난다.
차창 밖 배경처럼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데 세상이 바삐 나를 앞질러 달려가 버린 듯한 묘한 서운함이랄까?그 기분에 조바심이 함께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떠나는 인싸(인사이더) 버스를 놓치고 정류장에 남겨져 버린 듯한 기분은 최신 가요나 인기 연예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외출하기 전 옷을 입고 딸아이에게 확인하듯 물어보곤 한다. "엄마 옷 괜찮아? 안 이상해?" 혹시 지금 입은 내 옷차림이 그 옛날 수학여행 때 학교 선생님들이 입고 오셨던 옷들처럼 빛바랜 듯한 촌스러움을 풍기고 있지는 않은지 새삼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 이런 걱정들이 이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 간다.
뒤쳐진다는 압박감에 무턱대고 유행을 쫓던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얻어지는 좋은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많은 아이돌들 이름을 모르면 어떠냐. TV를 보다가 갑자기 내 눈에 확 들어오는 아이돌 한 둘을 덕질하는 재미도 크다. 노래도 좀 옛날 노래면 어떠냐. 노래는 나와 함께 나이가 드는 듯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감성을 선물한다. 옷도 과하게 유행을 챙기기보다는 내가 입기에 편안하면서 남이 보기에도 편안한 스타일을 찾게 된다.
이제 나는 그래도 괜찮은 나이이고, 그래서 좋은 나이라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도 나는 예민했던 성격이 미세하지만 조금씩 둥글어져 가는 게 반갑다.
잔뜩 벼려진 칼날은 예리하며 유능하다.
온몸을 긴장으로 무장하고 나 자신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삶은 여러 면에서 많은 성장을 가져온다.
하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그 칼날에 나 자신이 상처 입기도 한다.
나는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학창 시절부터 직장생활로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반복되는 경쟁과 긴장으로 뾰족한 털을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은 둘째 아이를 낳은 나이에도 수능시험장에서 하얀 답안지를 내는 꿈을 꾸게 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종종 몸과 마음에 과부하를 걸었다.
이제는 무뎌진 칼날은 그것대로 또한 좋다는 걸 느끼고 있다. 비록 무대공포증과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여전히 내 삶의 필수 옵션이지만 그 강도는 최고치를 찍고 내려오는 중이다.
그리고 최소한 '왜 이것밖에 못 하냐'라고 나 자신을 다그치는 일은 안 하려고 한다. 내가 나를 볶지 않아도 나를 호되게 단련시키는 환경은 이미 차고 넘친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도 알 거 같다. 포기라는 단어가 경쟁에 뒤처지는 듯한 불안감을 가져오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주변 시선에 대한 불필요한 의식과 과도한 자기 검열은 덜어내는 게 맞다.그 덜어냄이 곧 칼날을 무뎌지게 할지언정 나 자신이 보다 편안하고 안전해진다면 그 또한 좋은 것이다.
무뎌진 칼날은 날카로움을 좀 잃었을지는 몰라도 나름의 쓰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