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디자이너 김동환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의 글로 브런치에서의 기록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추운 겨울, 서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아일보 전광판에서 보게 된 질문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태도의 경중에 따라 다양할 것입니다. "내 집 마련이 꿈입니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쉬고 싶습니다", "치과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의 유년 시절 꿈을 말씀드리면 유명한 편집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받은 정형화된 교육 때문인지 아니면 직업 자체가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에 관한 질문은 곧 직업, 일과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일과 삶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유년 시절을 회고하자면 애늙은이 성향 때문에 학교생활이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차 방정식에 대해 배우면 아라비아 숫자의 기원과 패턴인식 사고의 근원을 찾아 내려가 정규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유보다는 라흐마니노프가 좋은 대충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고민은 노동과 삶의 균형이었습니다. 퍼시스가 발행한 '사무환경이 문화를 만든다'라는 책에서는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하루 대부분을 오피스에서 지낸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삶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을 것이고, 일이 즐겁지 않다면, 삶 자체가 즐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비에르 마리스칼 씨의 말 대로 일이 놀이고, 놀이가 일인 그런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왜 디자이너의 길을 택했는가? 재미로 시작했습니다. 이후 조금 진지하게 내가 이 일을 너무 사랑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그래도 공부한다면 나름의 경쟁력이 생겨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은 먹고살겠다는 생각으로 특성화고등학교로 전학 갔습니다. 사실 제가 온 마음을 다했었던 것들인 수영, 야구는 디자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건 취미로 남겨두는 게 좋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지금과 같이 디스플레이가 아닌 인쇄와 산업디자인의 황금기 시절, 저의 꿈은 제가 보고 자란 폴라 셰어,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칩 키드와 같이 스타 디자이너 반열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나나폰, 오렌지폰, 롤리팝, 매직홀 등 사용자 경험보다는 하드웨어적인 미관을 어필하던 나름의 낭만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흘러가더군요, DDP에서 만난 자하 하디드, 밀튼 글레이저, 알렉산드로 멘디니, 칼 라거펠트 등 저의 유년 시절을 함께 한 디자이너들 모두 하나둘 바람이 되었습니다. 모바일 디스플레이의 발전으로 모든 콘텐츠와 디자인은 화면 밖이 아닌 화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개발 지식에 대한 이해가 있는 디자이너의 중요성이 높아져 갔고 그렇게 저는 전역 후 조금 일찍 사회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면서 보안 및 퍼포먼스 문제로 기성 언어였던 플래시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개발자와 관련 업계 사람들은 이직하거나 다른 일을 알아보아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언어, 툴을 떠나 본질적으로 디자이너란 무엇일까?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노먼 포터의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됩니다. "모든 인간은 디자이너이다". 제 생각에 디자이너는 무언가를 재해석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신을 믿지 않지만, 디자이너는 신의 작품과도 같은 자연,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영감과 상상력으로 재해석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시대 디자이너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쓰겠지만, 어떤 툴을 사용하던, Platform, Product, UX/UI, Graphic 어떤 직함으로 어느 분야에서 일하던, 주어진 조건을 바탕으로 최선의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세상과 업계의 빠른 변화 속에서 최고의 스타 디자이너보다는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로 능동적으로 변하며 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가장 관심 있는 키워드는 '영감'입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놀이 같은 일이어도 업무가 반복되고 패턴이 단조롭다면 매너리즘과 번아웃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최근 지치고 슬픈 일들이 많아 업무적으로 정체되고 헤맨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한 번씩 가볍게 밀어주고, 사물을 보는 다양한 각도를 알려준 고마운 사람이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영감이 있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저는 개인적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지겨운 하루가 산뜻해지는 꽤 근사한 경험입니다. 몇 번의 그러한 경험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최근에는 영감을 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기원전 2600년 수메르인들에 의해 작성된 길가메쉬 서사시를 보면 시간을 뛰어넘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불로 불사약을 거절당한 길가메쉬는 불사신에게 묻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됩니까?". 불사신은 대답합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여행을 다니고, 사랑을 나눠라". 이 대답에 저의 고민, 꿈들을 대입해보면 근본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꿈이 뭔가요? 단순하지만 심오한,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스타트업에서 UX/UI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는 김동환입니다. 앞으로 디자인, IT업계에 대한 소식, 기술적인 문제와 해결책, 저의 몽상 등을 이곳에 기록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사무환경이 문화를 만든다 Vol. 1 사무환경 디자인의 시작 - 퍼시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3 Mariscal - 홍성일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 노먼 포터, 최성민
인터렉티브 디벨로퍼 - 김종민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 김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