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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평살이 Apr 24. 2021

루이스 부뉴엘 모호한 욕망의 대상(1977)을 보면서

초현실적인 현실의 얼굴들.

루이스 부누엘의 유작인 '모호한 욕망에 대상'을 보았습니다.


가만 보면 인간은 어떠한 생명체보다 욕망이란 신비를 강렬하게 경험하는 생명체입니다. 욕망이란건 잠재적으로 인생사를 <어떠한 것>으로 활유하려고 하는 <지향성>속에서 부유하며, 또한 이것은 <충족될 수 없음>으로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빈 구성물의 연쇄고리라고 라캉은 말한적이 있습니다. 루이스 부누엘의 <모호한 욕망에 대상>은 잠재적으로 기능하는 <가능성>에 대한 회귀의 돌림 노래처럼 반복적으로 경험됩니다. 이는 모호함 자체가 욕망이며, 그 모호함을 대상화하는 것조차도 모호함에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충족할 수 없는 모호한 욕망속에서 영화는 부호인 중년인 마티유와 20세도 채 되지 않은 18세인 소녀인 콘치타의 욕망사이를 끊임없이 방황하는 것처럼 묘사가 됩니다. 영화는 이러한 모호함을 루이스 부누엘의 장기인 '초현실주의'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콘치타의 역할을 2인 1역으로 연출함으로써 관객들 또한 영화를 모호하게 관망하게 됩니다.  


마티유의 시선은 늘상 콘치타의 생식기를 향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고, 콘티유에게 섹스에 대한 갈증을 호소하지만, 콘티유는 <나중에> 혹은 <사랑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식의 태도로 일관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욕망의 줄다리기가 지속적으로 지연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에 대한 욕망과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욕망, 물질추구의 욕망들이 혼재되어 욕망의 우주는 더욱 더 모호해져 갑니다. 처음부터 영화의 결말까지 영화는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함속으로 관객들을 안내합니다. 둘의 마지막씬으로 쇼핑몰에서  하는 것이 '사랑'의 결말처럼 완결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화면이 '폭발'하며 연기로 뒤덮이며 마무리하는 장면은 그가 욕망을 어떻게 사유하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지요. 


1977년도에 개봉된 이 영화는 그 시대의 사회의 분위기를 중간중간마다 반복적으로 비춥니다. 주로 테러가 일어나는 현장을 지속적으로 영화에 배치하는데, 이는 영화가 욕망이라는 연속선안에서 사회가 결부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진영 논리 자체도 모호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극좌세력의 이름이 아기 예수 혁명군(Revolutionay Army of the Baby Jesus)이고, 그 조직이 대주교에게 총살을 가했다는 뉴스는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결과적으로 욕망은 공개되어 있어 있는 무의식처럼 여겨집니다. 분명한 욕망을 외치는 인간은 충족될 수 없는 욕망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모호하지요. 어쩌면 욕망이란 잠재태가 무엇인지 우린 '근거 없이' 알지만, 그게 '왜' 인진 알수 없다는 하이데거의 논리학의 명제처럼 우리는 늘상 모호함이라는 구름속을 비행하는 모호함 자체 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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