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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y 12. 2022

강한 백합이었던 마녀

Meaning Flower-영화 <해리 포터>에 나온 백합

세상은 창작의 소재로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자연은 최고의 재료 창고다. 꽃 역시 대표적이다. 특히 장미와 백합은 빠져선 안 된다. 화려하고 요염한 장미와 순수하고 고결한 백합으로 얼마나 많은 작품이 나왔던가. 소설이든 영화든 가릴 것 없이 두 꽃의 자리는 뚜렷했다. 함께 나오든 따로 나오든, 둘은 어디서나 제 매력을 뽐냈다. 전 세계를 뒤흔든 <해리 포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리 포터>의 주인공이 꽃 이름이었던 건 아니다. 대신 주인공보다도 시선을 받은 주인공의 어머니 이름이 ‘릴리(Lily)’-백합이었다. 후에 주인공 해리의 딸 이름은 로즈(Rose)-장미인데, 어머니의 이름을 신경 써 지은 이름으로 생각된다. 장미와 백합의 대비가 조손 간의 사이에서 드러난 것이다. 보통 라이벌 관계에서 보이는 설정이란 걸 감안하면, 독특한 편이라 할 수 있다. 호그와트라는 새로운 마법사의 세상을 창조한 작가의 특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차이에서 멈추지 않고, 인물의 모습 자체도 신선하게 등장했으니까. 보통 이름이 백합이나 데이지처럼 희고 순수한 꽃이면 외양도 따라간다. 백합 하면 떠오르는 여인, 아서왕의 전설 속 ‘백합 아가씨’ 일레인처럼 말이다. 아스라이 순수하고 가냘픈 인상은 백합과 함께하는 법칙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해리의 어머니 릴리 에반스는 전혀 다른 외모로 묘사된다. 타고나길 정의의 그리핀도르였음을 입증하듯 붉은 머리에 초록빛 눈, 쾌활한 성격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특징은 <해리포터>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도 주목하게 만들었다.    

 

<백합의 모습. 백합의 꽃잎은 사실 3장으로, 바깥의 3장은 꽃받침이라고 한다.>


사실 백합이란 꽃의 성질은 놀랍도록 릴리란 인물과 닮아 있다. 백합의 이름부터가 남다르다. 보통 백합의 이름이 색을 의미한다고 여기는데, 사실 백합은 흰 꽃송이가 원예 쪽에서 각광받아 본래 하얗다는 인식이 박혀 있을 뿐이다. 야생에선 흰색이 가장 찾기 어렵다고 한다. 오히려 이름은 꽃의 모양이 아니라 그 뿌리와 효능에서 비롯됐다. 백합의 전설은 여러 가지가 존재하지만, 이런 뿌리의 특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특히 유별나서 소개해본다.      


옛날 해적이 한 어촌의 여성과 아이들을 납치해 외딴섬에 가뒀다. 배가 없어 도망치지도 못하고 갇혀있었는데, 때마침 태풍이 불어 해적선이 침몰하면서 해적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남겨진 사람들은 보름이 지나자 양식이 모두 바닥나 풀뿌리와 열매를 찾아 먹어야 했다. 그러다 그들은 마늘과 비슷한 풀을 발견했고, 먹어보니 맛있었다. 모두가 그 뿌리로 든든히 배를 채워 연명해 가다가 구조되자 주위가 놀라 무엇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 약초에 대해 전해 들은 다음 살피니 구조된 사람들의 모습이 건강하게 윤기가 흘러 풀뿌리를 뽑아 가져 갔다. 아무도 이름을 아는 이가 없어 고민했는데, 마침 섬에 갇혔던 사람들의 수가 딱 백 명에 모두가 합심해 살아남았으므로 이 약 이름을 백합(百合)이라 지었다. 그래서 그 약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백합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백합 뿌리의 생김새. 마늘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실제 백합의 뿌리는 100개의 비늘줄기로 구성되어, 그럴듯한 유래로 보인다. 작중 릴리는 워낙 정의감이 넘치기도 하지만, 거의 다 잊혀가는 고대 주문으로 아이를 보호할 만큼 ‘보호하고 돕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백합을 이름으로 삼았음에도 붉은 머리인 데서 많이 놀랐지만, 그녀의 백합향은 자태가 아니라 이로운 영향에서 우러나와 있었다. <동의보감>에서도 백합은 평생 화목하게 지낸다는 의미로 지어진 약재라고 등장하며, 기침·부종·종기 등에 좋다고 기록됐다. 점액은 연고로, 꽃잎은 향수로 동서양에서 사랑받기도 했다. 거기에 오랫동안 식재료 겸 향신료로 쓰였단 점만 봐도 백합이 그저 고운 장식용이 아닌, 쓸모 있고 우리 생활에 깊이 자리한 존재임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런 백합의 단단한 뿌리에서 비롯된 가치가 릴리라는 인물의 시작일 수도 있다.      


릴리는 기숙사 배정이 1초 만에 끝났다고 한다. 저런 사람이 현존할까 의심될 만큼 예쁘고 올곧으며 정의롭고, 똑 부러진 사람이었던 거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사람이었기에 작중 고인임에도 그녀의 존재감은 선명하다. 해리에게서 그녀의 흔적을 찾는 사람이 교수와 사냥터지기를 비롯해 줄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주목해야 될 건, 그런 평이 모든 이에게서 나왔으며 변치 않았던 점이다. 착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기는 어렵다. 얼마나 많은 유혹과 고난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 않는가. ‘착하고 좋은 사람’은 힘겨운 날에 밀리지 않는 굳은 심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릴리는 딱 그런 인물이었다. 본인이 마법 세계에서 차별받는 머글(마법 쓰지 못하는 일반인) 출신임에도 기가 꺾이지 않고 옳은 길을 추구했다. 이 또한 그녀의 이름인 꽃과 관련 있었다. 


백합의 꽃말이 ‘순결’, ‘변함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 임을 떠올리면 그녀의 이름은 딱 적합하다. 영국과 미국에서 장례식용으로 백합을 사용해서 생긴 ‘죽음’이란 의미마저도 어울린다. 그녀는 주인공인 ‘예언의 아이’이자 자신의 아들인 해리를 지키다 죽음으로써 서사가 완성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나는 붉은 머리 밝은 성격에 백합의 이름을 가진 인물이 너무 어색했는데, 이렇게 정리해보니 릴리의 이름은 릴리밖에 없는 것 같다.      

지금도 누군가는 꽃을 보고 이야기를 써내고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백합과 장미의 다툼일 수도 있고, 백합을 닮은 장미이거나 장미 속에 있어 상처받는 백합일 수도 있다. 다채롭고 재밌는 상상들이겠지만, 내게 릴리 에반스만큼의 신선함은 못 주리라 본다. 누구보다 장미 같은 화사한 매력을 뽐냈음에도, 그 성격과 인생이 백합 그 자체인 인물은 정말 처음이었다. 전혀 상관없는 두 이미지가 합쳐져 나온 시너지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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