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문 Don Kim Nov 24. 2021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모범적인 '기도의 여인'일 뿐?

Gerbrand van den Eeckhout (1621–1674) 엘리 제사장에게 사무엘을 맡기는 한나 (1665)


사무엘의 엄마 한나의 이야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고대 이스라엘의 사사, 선지자로 알려진 사무엘, 그의 탄생의 이야기에 그의 엄마 이야기가 사무엘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도의 여인, 한나의 기도, 한나의 노래도 더 많이 알려진 것 같다. 그런데 기도하여 아들, 이스라엘을 살려낸 믿음의 사사, 예언자를 낳은 위대한 어머니, 그것만으로 한나를 보면 족한 것일까?


성경의 특정 내러티브, 이야기는 특정 지역, 특정 시대를 반영한다. 성경은 그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창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반영되거나 성경 속 등장인물들이 강조하는 것도 시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 그 대화 속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 드러난 것, 성경 속 등장인물들이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이 성경 자체의 강조점으로 보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다.


사무엘상 1장에 반영된 그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많은 경우 성경 내러티브는 그 시대를 반영할 뿐, 시대상에 대한 평가에 대해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독자가 다 성경 저자의 의중을 다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무엘상 1, 2장에서 소개하는 몇 개의 장면에 주목해 본다. 특히 제물드림(헌물, 봉헌..), 서원 등에 대해 떠올려 본다.



첫 번째 장면 : 한나는 누구?


한나는 뼈대 있는 집안에 시집간 여인이다. 한나의 남편의 족보가 화려하게 언급된다. (사무엘상 1:1) 한나는 그 남자(엘가나)의 부인 중 한 명이었다. 누가 첫째 부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한나가 첫째 부인이었을 개연성이 짙다. 여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면 여자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대를 염두에 둔 상상이다.


한나의 남편은 엄청나게 부자였다. 덕분에 한나도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한나의 남편은 아주 종교적이었다. 해마다 정해진 절기에 실로를 찾아 제사를 드렸다. 게다가 어떤 목적의 서원인지 모르지만, 서원제도 드렸다.(1:21) 제물의 양도 대단했다.



 번째 장면 : 한나의 과식?

Rembrandt, Hannah and Samuel in the temple, 1650

성경 속 브닌나에게 몇 명의 자녀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몇 남 몇 녀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최소한 3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은 할 수 있다.(히브리어 숫자 표현 방식을 살짝 응용해서 볼 때). 1:4절에 보면 브닌나는 3명 이상의 아들과 3명 이상의 딸을 두고 있다.


또한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1:2)는 표현은 아들딸로서의 자녀가 없었다는 것이기 보다 아들(들)이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나가 처음부터 임신 불능의 상태였다기 보다 아들을 못 낳은, 못 낳고 있는 상태로 볼 여지가 조금은 있어 보인다.


1:5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도 조심스럽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그 시대 정서가, 한 여인의 임신과 불임이 다 당사자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나? 특히 아들을 낳는 것은 신의 축복이고, 누리지 못하는 것은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 사무엘상 1:4, 5


한나의 몫으로 브닌나 가족들에게 준 것의 곱절을 주었다고 할 때, 그것을 먹는 한나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아들이 없는 것으로 인한 결핍, 마음 상함을 제사 음식 넉넉하게 먹는 것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엘가나의 한나에 대한 마음 씀쓰미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번째 장면 : 엘가나의 종교적 열심?

1:4, 엘가나가 언제, 어느 절기에, 어떤 제사를 드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가 드린 제물은 무엇이었을까? 소, 양(또는 염소), 아니면 비둘기, 곡식.. 소 아니면 양(또는 염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친 제물을 제물 바치는 자가 그의 가족들과 먹는 것을 볼 수 있다. 제물로 바쳐진 고기는 그 자리에서 다 먹도록 레위기 율법은 규정하고 있다. 자기 몫으로 받은 고기를 남기거나 버릴 수는 없었다.


1: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한나가 바친 이 엄청난 제물의 양에 놀랐다. 수소 3마리! 밀가루 22리터, 포도주 20리터 이상... 이른바 봉헌 예물로 이렇게 바쳤다고 사무엘이 그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면 구경도 못할 것이 소였다. 소 3마리를 제물로, 아니면 실로의 제사장에게 바쳤다.


이 제물의 성격은 무엇이었을까?도대체 왜 엘가나는 이 엄청난 분량의 제물을 바친 것일까? 율법이 그렇게 바치도록 명령하지도 않는데, 자발적인 것인데, 지나치다.


레위기 규정에 따르면 제물로 바치는 동물은 제물 바치는 자가 직접 잡도록 되어 있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가 직접 제물을 바쳤는지는 모르겠다. 레위기의 제사 규정이 이 시대에 지켜지고 있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만약 한나가 레위기 제사 규정(레위기 3:1-5)을 지켰다면, 소를 잡는 엘가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한나의 모습을 떠올려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한나가 제물을 직접 바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그것은 불가능하다. 여자가 제물을 직접 잡아 바치는 경우가 레위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남자 대리인(아버지, 아들, 남편)이 그 몫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장면 : 서원? 하나님 앞에 맹세하기?


한나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서원'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서원?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약속하는 것이 아닌가?그런데 다른 이의 목숨과 삶을 제3자가 대신 좌우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한나가)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무엘상 1:11)


서원에 대해 조금 길게 소개하고 있는 본문은 민수기 30장이다. 그런데 나의 서원에 다른 이의 현재와 미래를 대신 거는, 바치는 그런 내용의 서원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서원의 효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한나의 서원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구절을 참고할 수 있기는 하다.


"모든 서원과 마음을 자제하기로 한 모든 서약은 그의 남편이 그것을 지키게도 할 수 있고 무효하게도 할 수 있으니, 그의 남편이 여러 날이 지나도록 말이 없으면 아내의 서원과 스스로 결심한 일을 지키게 하는 것이니, 이는 그가 그것을 들을 때에 그의 아내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므로 지키게 됨이니라." (민수기 30:13, 14)



다섯 번째 장면 : 안 보여도 서로를 보는 그리움


사무엘의 고향 라마(다임소빔)과 실로 사이는 40여 킬로미터 정도 거리이다. 걸어서 2-3일 길에 해당한다. 부자 엘가나와 그의 아내 한나가 그리고 가족들이 라마와 실로를 오가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야말로 대가족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걸어서 가든 나귀를 타고 가든 2-3일 길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부자들, 권력자들은 나귀를 타고 이동했다. 나귀는 힘과 부의 상징이었다.


(왼쪽) 실로에서 사무엘의 고향 라마가, (오른쪽) 라마에서 사무엘이 머물고 있는 실로가 보인다. 구글 어스 갈무리


소와 양, 염소를 몰고, 그리고 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무리 지어 가는 한나가 포함된 그 행렬을 상상해 보라. 부자 엘가나의 아내였던 한나와 브닌나에게는 그들을 섬기는 하인과 하녀들이 있었을 것이다. 힘 좀 쓰는 호위하며 가는 이들도 당연히 동행했을 것이다.


실로(이미지 아래 둥근 부분)에서 라마를 바라보다. 구글 어스 갈무리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남서쪽 라마에서 북동쪽 실로로 가고 있는 한나와 사무엘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실로에 오늘날 유치원 다닐 나이의 어린 자식을 맡기고 홀로 산을 넘고 넘어 라마로 돌아오는 한나를 생각해보라. 해가 뜨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흘렸을 한나의 피눈물과 해질 무렵이면 더 그림움이 커졌을, 사무엘, 그가 라마를 바라보면서 흘렸을 피눈물을 생각하는 것이 이상할까?



한나의 또다른 노래?


한나도 그 시대를 살던 여성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아들의 존재는 무엇이었고, 실로 성막에서 그가 했다는 종교적 서원은 어떤 종교적 의미였을까? 사무엘은 엄마를, 한나는 아들을 빼앗긴 셈이었다. 두 사람 모두 헤어짐, 떨어짐으로 인한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기의 삶인데도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없는 환경을 살아가던 것이었다. 서원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바쳐야만 했던 것일까? 한나가 그 비통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면 어떤 시였을까?


천천히 아주 느긋하게 사무엘서 1장의 이야기 무대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본다. 이 배경을 바탕으로, 한나의 기도를 떠올려 보면 어떤 생각과 감정이 다가올까? 엘가나에게 있어서 종교생활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무엘에게 엄마 한나는, 아버지 엘가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한나의 기도 이야기는 그 시대의 그릇된 서원 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일까? 지나친 종교적 열심이 가져다 주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말하는 것일까? 한나의 기도는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무엘상에 기록한 한나의 기도(사무엘상 2:1-10)에는 무관심하고, 눈길을 주지도 않는 것은 아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