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책 읽기] 김지수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는 동안 이따금 뇌가 저릿하고 몸이 배배 꼬였다. 고민이라곤 오늘은 뭐 먹지, 어제 본 그 옷 살까 말까 수준에서 머무르던 내게 이 책은 좋은 자극이었다. 과분한 자극이었다.
김지수 기자가 죽음을 앞둔 스승 이어령을 만난다. 삶과 죽음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스승은 말한다.
주머니에 유리그릇 넣고 다녀봐. 깨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 그게 죽음이라네.
“맞아.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그러니 자네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 들춰지는 것들을 그때그때 잘 스냅하게나.”
생명이 있는 것은 결국 다 죽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고도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마치 주머니에 유리그릇이 아닌 고철덩어리를 가진 듯. 하루를 살아가기도 벅차 죽음을 덮고 잊는다. 이어령 선생은 우리에게 말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에 대해 묘사하는 이어령 선생의 말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암 통보를 받은 그에게 죽음은 철창을 뚫고 나온 호랑이였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문화부 장관, 교수, 국문학자, 작가 등 수많은 직업을 가졌던 이어령 선생. 죽음 직전까지 묻고, 생각하고, 썼다. 그에게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곧 ‘살아있음’이었다. 오늘도 다시 다짐해 본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자, 많이 쓰자”
나는 평생 누굴 보고 겁을 먹은 적이 거의 없어. 헤겔, 칸트도 나는 무섭지 않았어. 나는 내 머리로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하나 내 머리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은 흔치 않거든.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에고이스트지. 에고이스트가 아니면 글을 못 써.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쓰는 거야. 자기 생각에 열을 내는 거지. 어쩌면 독재자하고 비슷해. 지독하게 에고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되기 때문이라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 거지.” “암요. ‘자아’를 통과한 글만이 만인의 심장을 울리니까요. 선생님은 지난번 저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것이 내가 받은 선물이었다’라고 하셨어요. 일단 그것부터 시작할까요?”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쓸 수 있다면…… 그렇네. ‘사람이 어떻게 끝나가는가’를 보고 기록하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 갈증을 채우는 일이야. 내가 파고자 하는 최후의 우물이지. 암이 내 몸으로 번져가는 것을 관찰하면서 죽음에 직면하기로 한 것은 희망에 찬 결정이란 말일세.
스승 이어령은 지성과 감성뿐만 아니라 영성까지 뛰어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생과 사의 엷은 막을 느꼈다고. 내가 생각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지성을 넘어서 영성까지 가진 이다. 이 세상을 통달했다는 것도, 우주의 개념으로 볼 때는 우습기만 한 일이니까. 그와 하나님의 관계는 얼마나 친밀했던 걸까.
글이 너무 중구난방이 된 거 같지만, 아무튼 이 책은 내게 사고의 차원이 이토록 넓고 깊을 수 있음을 알려줬다. 글과 문장이 주는 아름다움과 황홀함을 알게 해 줬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하며 살 수가 있구나,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온 걸까, 아니 내가 해온 게 생각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싶었다. 이어령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1년이 지난 뒤 읽게 됐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잠시나마 곁에 살아 숨 쉬는 생생함이 느껴졌다. 글이 주는 힘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