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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롱타임노씨 Feb 27. 2023

때로 아이는 어른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가

[2023년 책 읽기]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 소공녀

아이들은 때때로 어른을 부끄럽게 만든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알아도 아이보다 못한 어른도 많다. 성경 속 예수님은 제자를 꾸짖으시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강조하셨다.


사람들이 아기들까지 예수께로 데려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제자들이 보고서,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아기들을 가까이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누가복음서‬ ‭18‬:‭15‬-‭16)


최근, 책 '소공녀' 속 세라를 만났다. 부유한 홀아버지 '랄프 크루'와 함께 인도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온 어린 '세라'. 딸 세라를 끔찍 아꼈던 랄프 크루지만, 교육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세라를 영국의 한 기숙 학교로 보낸다. 똑똑한 두뇌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세라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을 기숙학교에 보내고, 다시 인도로 돌아가는 아빠를 보면서도 눈물을 참는다. 떼쓰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학교에는 탐욕스럽고 못된 '민친 선생'이 있다. 민친 선생은 돈 많은 랄프 크루에게 더 많은 후원금을 얻어내기 위해 세라에게 잘해주는 척하지만 누구보다도 마음속 깊이 세라를 미워한다. 학교 아이들에게 부잣집 딸 세라는 뜨거운 화제의 주인공이다. 누구에겐 선망의 대상, 또 다른 이에겐 질투의 대상이다. 


모두의 시선이 세라에게로 향할 때, 세라의 시선은 어디로 향했을까. 이해력이 부족해 학업에서 뒤처지는 '세인트 존', 어리다고 무시당하는 '로티', 설거지 하녀로 학대받는 또래 여자아이 '베키'에게로 향했다. 세라는 그들과 좋은 친구가 됐다. 친구가 되는데 지능, 나이, 신분은 상관없었다.


세라는 알고 있었다. 세라가 세라로, 세인트 존이 세인트 존으로, 로티가 로티로, 베키가 베키로 태어난 이 모든 것은 그냥 우연일 뿐이란걸. 그리고 그 우연으로 인해 자신이 받는 차별과 특혜라는 단단한 장벽에 금을 냈다.


“그래, 우리는 똑같은 아이야.. 나나 너나 똑같은 여자애라고.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닌 건 우연일 뿐이야!”

“베키도 여자애예요. 베키도 구경하는 걸 좋아해요. 부탁이에요.. 오늘은 제 생일이잖아요.”


어느 날, 민친 선생은 세라의 아빠가 인도에서 전 재산을 잃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후 본격적으로 세라에게 못된 속내를 드러낸다. 으리으리한 방, 공주 같은 옷, 풍요로운 먹거리로 둘러였던 세라의 환경은 한순간에 180도 바뀐다. 학생에서 하녀로 전락했고, 차디찬 다락방에서 자야 했고, 몸을 구겨 넣어야 간신히 들어가는 작고 볼품없는 옷을 입었다.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갈수록 야위였다.


그녀는 학교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로 전락했고, 수군거림을 감당해야 했다. 친구였던 세인트 존마저 자신을 피한다고 오해했다. 하지만 애초에 친구 세인트 존을 조건 없이 사랑했던 세라처럼, 세인트 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세라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너는 나보다 훨씬 좋은 아이야. 나는 자존심만 강해서 친구 마음을 살필지 몰라. 너도 알겠지만, 시련이 몰아쳐서 나는 좋은 아이가 아니라는 게 드러났어. 안타깝지만 사실이야.”


세라는 타인의 부족함은 티끌처럼, 자신의 부족함은 태산처럼 볼 줄 아는 아이였다. 그리고 이를 겸손히 고백할 줄도 알았다. 세라는 스스로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겐 엄격한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또한 타인에게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고자 했던 지난날들도 부끄럽게 했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나의 부족함을 고백할수록 더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고, 오히려 완벽하게 보이려 할수록 그 사람의 결핍이 보이니 말이다.


세라는 자신의 행색을 보고 거지로 생각해 돈을 건네는 아이에게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누군가 나를 거지로 보고 적선하려 한다면, 보통은 불쑥 방어기제가 튀어나오면서 분노로 표현될 것이다. 하지만 세라는 먼저 자신을 도우려는 아이의 마음을 꿰뚫어봤다. 아이는 위선이 아닌 진심이었다. 이에 세라는 그녀의 자존심보다 아이가 상처받을 것을 우위에 뒀다. 또한 자기를 학대하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분노마저, 주린 배고픔마저 다스렸다. 


아이 얼굴에 순수하고 다정한 느낌이 가득한 데다 자신이 돈을 안 받으면 크게 실망할 것 같아, 세라는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순간에 자존심만 내세우는 건 잔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존심은 주머니에 꾸겨 넣어도,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 너는 참 착하고 귀여운 아이구나.” 그러자 아이는 마차에 신나게 오르고 세라는 떠났다. 웃으려고 애쓰는데 호흡이 빨라지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이 초라하고 이상하게 보인다는 건 알지만, 거지로 보일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가 자기네보다 강하다고 느끼거든. 나는 분노를 참을 만큼 강한데, 그들은 못 참고 나중에 후회할 말을 멍청하게 내뱉기 때문이야. 분노는 강해. 하지만 그걸 꾹 참는 건 더 강한 거야. 적군한테는 대답하지 않는 게 좋아. 나도 자주 그러거든. 어쩌면 에밀리가 나보다 더 나 같을 수 있어. 그래서 친구한테도 대답을 안 하는 걸 수 있어.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는 거야.”

‘나보다 굶주린 아이야. 굶어 죽기 직전이야.’ 하지만 네 번째 빵을 내려놓을 때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나는 굶어 죽진 않아.’ 세라가 말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빵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책을 읽으면서 세라의 따뜻한 마음이 때론 싫었다. 누가 이토록 어리고 작은 소녀에게 이리도 큰마음을 품게 한 걸까. 아이라면 누구보다도 자기의 안위와 마음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하지 않는가. 화나면 화난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왜 타인의 더 큰 고통이 자신의 고통을 억누르고 외면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지.


소공녀의 스토리는 참 잔인하다. 먹어본 맛이 더 참기 힘들고, 줬다 뺐는 게 더 치사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게 더 견디기 힘들다. 꼭대기에서 나락으로 순식간에 추락하면서도 세라는 우리에게 눈물 나는 위로를 던진다. 최악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널 향한 마법이 기적처럼 널 도울 것이라고.


“모든 게 최악으로 치닫는 것 같을 때도 어떤 식으로든 좋은 일이 일어나는 법이야. 그게 마법이야. 아, 그 법칙을 언제나 기억하고 싶어. 최악은 절대로 안 일어나.”

“생각하며 기다리면 뭔가 떠올라. 마법이 알려주거든.” 세라가 제일 좋아하는 공상 가운데 하나는 “바깥에서” 생각이 기다리다 사람이 부르면 달려온다는 거다. 베키는 세라가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광경을 전에도 여러 번 보았다. 잠시 뒤에 세라가 기쁜 표정으로 손을 내리고 환하게 웃을 게 분명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세라가 소리쳤다. “그래! 생각이 달려왔어! 이제 알겠어! 내가 공주 때 사용하던 옷 가방을 뒤지는 거야.” 세라는 모서리로 날아가서 무릎을 꿇었다. 세라를 위한 게 아니라 놓을 데가 없어서 다락방에 처박은 가방이었다. 거기에 남은 건 하나같이 쓰레기였다. 하지만 뭔가 분명히 나타날 거라고 세라는 확신했다. 마법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사람을 늘 도와준다.


이야기의 반전은 있다. 전 재산을 잃은 줄 알았지만, 세라 아빠의 친구가 이를 찾아 세라에게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리고 민친 선생의 학교에서 세라를 구출하고, 그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세라는 말한다. 이제 자신이 누군가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되어 기쁘다고.


“네, 저는 공주라서 백성한테 빵 같은 걸 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세라가 마음에 사무쳤다.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주린 배를 채워주고,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었더라면. 혹은 현실에서 또 다른 세라를 마주할 때 그들에게 내 시선이 향할 수 있다면. 그들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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