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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씨 Mar 31. 2023

장기 백수로 산다는 것

백수로서는 경력직입니다






 나는 33살 장기 백수로, 백수로서는 경력직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각종 아르바이트와 정규직을 포함해서 순수하게 일해서 번 돈이 총 2천만원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되시려나. 그 정도로 오래 놀아, 아니 요양을 해온 사람이다. 아프다는 이야기는 이전에도 많이 써놨으니 생략하고 오늘은 장기 백수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써보려고 한다.     






 백수 기간이 장기화되기 시작하면 생기는 변화로는 죄책감이 사라진다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저절로 침대에 자주 누워있고 늦잠과 낮잠을 즐기게 되는데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도 띵가띵가 한다는 불안과 죄책감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누워서 잔뜩 딩굴댕굴하면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 시간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밖에 돌아다니긴커녕 앉아있거나 서있는 것조차 불편해지고, 일하는 상상을 하면 어색함과 함께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한, 일하지 않으면 밥값을 하지 못한다라든지, 사람은 제 몫을 하며 밥벌이를 하고 살아야 한다든지의 부지런한 타인들의 기준과 신념에 좀처럼 따라가지 않게 된다. 조금만 벌거나 있는 거 아껴 쓰면 된다는 합리화와 함께 점점 사회생활을 어른의 기본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간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먼 미래를 생각하면 당연히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는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부지런한 현대 직장인이 된 내 모습을 떠올리며 자소설을 작성한다.     






 한편, 장기 백수의 널널한 시간표가 좋은 역할을 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워킹맘 친구와 평일에도 휴가로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일을 하고 있는 상태라면 애가 둘이라 주말, 평일 할 것 없는 직장인 친구와 만날 날은 아주 한정적이라서 만남이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 친구는 날 백수가 아닌 프리랜서라고 불러주면서 우리의 만남을 즐겁게 누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런 점은 참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날 백수를 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아니지 않겠는가.     






 솔직히 이런 베프 외의 다른 친구들의 시선은 썩 곱지 않다. 너무 오래 쉬다 보니 주변인들은 내가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는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느끼게 만든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백수가 될 생각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이례적인 모습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금수저나 로또가 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언젠가는 밖에 나가 일해야 한다는 걸 아는 것 같다. 나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들의 은근한 무시도 느껴져온다. 너는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가끔 받을 때면 나도 모르게 상대적 박탈감으로 연결되어 초라해질 때도 많다. 





    

 일하기 원했지만 하지 못했던 나의 긴 시간들이 요즘은 점점 어깨를 짓눌러온다. 뚜렷하고 주기적인 수입 없이 살아온 나는 친구의 명품 가방 앞에서 살짝 주눅이 들고 만다. 명품 들어봤자 결국 월급쟁이일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해 봤자 그것마저 되지 못한 나에게는 정신적 에너지만 소모될 뿐이다. 솔직히 통장에 명품 가방 몇 개는 살 수 있는 돈은 들어있지만 밝지 않은 미래를 위한 대비로 항상 아껴두고서 언젠가 벌어서 하나쯤 사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그깟 명품이 뭐라고 장기 백수가 줏대 없이 말이다.     





 

 슬프지만 장기 백수가 명품백을 사기 위한 목표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엔 물욕이 너무나 적음을 느낀다. 나를 사회로 다시 이끌어줄 동기는 뭐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해 보았다. 그러자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가 떠올랐다. 장기 백수의 지긋지긋한 생각과 일상을 더 적기엔 소재는 이미 달리고 고갈되었다. 얼씨구나 잘 되었다. 나는 취미로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브런치에도 헛소리를 자주 늘어놓지만 마음만큼은 진심인 사람이다. 앞으로는 33살 신입사원의 사회생활 이야기로 브런치를 마음껏 채우리라는 의지를 품고서 아마추어 예술가의 꿈을 계속 펼쳐야겠다. 돈도 돈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글 쓸 거리를 찾기 위해 일하러 나가는 내 예술적인 모습에 벌써부터 취한다. 크으.     






 사실 장기 백수의 모든 잘못된 습관과 경제적 어려움은 일만 하면 모두 끝나는 문제다. 아침 6시, 7시에 일어나 9 to 6로 일하고 집에 와서는 폰을 만지다 곯아떨어지는 흔한 직장인의 삶이 몹시 애가 탈 정도로 갖고 싶어졌다. 33살의 무경력 백수의 꿈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현타에 빠질 순간에 ‘남들 다 하는데 왜 네가 못해?’라는 심신안정 치트키이자 인생 모토가 된 이 문장 하나로 한동안 취준기간을 잘 버텨내리라 생각한다.     





 33살 무경력 백수. 백수로서는 경력직이지만 웃기게도 당연히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가족마저도 실망시킨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모두의 기대를 낮췄다. 이제 내가 아주 성공하고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앞으로 난 내 멋대로 돈도 조금만 벌어도 주변 모두가 감사해하고 안도해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딱 중간만 가도 성공이니 이렇게 쉬운 삶이 또 있을까. 불교에서 말했던 만족이란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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