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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씨 Jul 30. 2024

뭐라도 하는 백수는 다르다

사회적 백수인






 5년 된 중고 노트북을 켜고 한글 새 파일을 띄우는 데까지 걸린 시간, 5분. 노트북을 바꿀 때가 된 것 같은데 지난번 서울에서 들린 전시장의 최고사양 제품가격이 200만원이었던 게 떠오른다. 이번에는 신제품, 좋은 걸로 사야지 하는 마음에, 기껏 해봤자 타자나 또닥또닥 칠 노트북에다 200만원을 투자하기엔 내 간덩이가 너무 작다. 현재 직업도 없는 상황에 노트북까지 간당간당하네.






 백수가 된 요즘, 일주일에 한 번은 대학 동기의 유튜브에 일본어 번역자막을 달아주고 있다. 처음에는 내가 먼저 “해줄까?” 했던 게, 이젠 친구가 먼저 카톡으로 자막파일 2개를 보내준다.

 한국어 자막파일과 한 번 파파고로 번역한 일본어 자막파일을 대조해 보면서 최대한 내가 아는 지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어 문장을 다듬고 때론 적절히 표현도 가감한다. 또 먼저 영상을 보고 번역을 하면 보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내용의 흐름과 맞아떨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영상 업로드 후에 착수하는 편이다.   


   

 요즘 아무리 파파고 번역이 정확하고 좋다고는 하지만, 한번 기계 번역된 일본어를 또다시 일본어스럽게 표현하려면 살짝 다듬거나 어느 정도의 의역도 필요하다는 것도 실감했다. 또한 ‘나’를 표현할 때 여자는 ‘私’를 쓰니까 파파고가 성별을 모르고 번역한 부분도 잘 바꿔줘야 한다.  


    

 나름대로 학창 시절 오타쿠에다 대학생 때도 주전공으로 공부했으니 적당히 사전 검색도 겸하면 식은 죽 먹기다. 그런데도 하다 보면 2시간이나 걸리는 걸 보니 번역 자막 만드는 게 보통 일은 아니라고 느끼긴 한다. 무보수에 취미 삼아 하는 거지만 일주일에 딱 2시간을 투자해서 학교 동기에게 보내주고 나면 나도 공부가 되고 마음이 뿌듯해지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다. 백수지만 뭐라도 하고 있는 백수인 셈이니까.  






 또 동네 친한 친구랑은 줄기차게 만나서 재미있게 노는 편이다. 적당한 가격대의 맛집에 가고 예쁜 소품샵이나 카페도 들러 수다를 떨고, 가끔은 맥주 한 잔을 기울인다. 한 번씩  친구의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거나 집에서 놀아주기도 하는데 친구 말로는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대한다며 유치원 선생님 쪽으로 진로를 잡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했다.      

 실제로 친구가 아이들의 학습교사를 해달라고 부탁해오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잘 키울 것 같다고 말해줬는데 실상 나는 자신이 없는걸 어떻게 하나.


 인생살이에 자신감을 잃은지도 오래되었고 이 나이에 직장 생활도 겨우 시작한 내가 결혼, 출산, 육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 이렇게 방황하는 삶을 살다가 조용히 사라지겠지. 너무 부정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경제력 있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내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보잘것없이 살아와서 좋은 부모가 되긴 힘들 것 같아서다.  



   


 한편, 집에 있을 때는 엄마의 요리 보조자가 되어 재료 손질을 하고 부족한 간을 개인적으로 자신하기에도 잘 맞추기 때문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또 집안 대소사에 적극 참여하고 인터넷 주문이나 서류 처리 등 심부름도 맡아서 해왔다.

어쨌든, 이런 나도 세상에서 할 일이 있고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에게도 약간은 도움이 되는 걸 보니 희망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장 변변치 않게 살아왔고 돈도 많이 못 벌었지만, 그런 장점들이나 적어도 겨우 들어온 소박하고 적은 돈을 어떻게든 모으고 지키는 능력은 또 있더라.





 이 세상이 원하는 대단한 능력, 스펙은 없지만 가만히 누워있지 않고 뭐라도 하려고 노력하고 준비하는 백수가 나다. 기죽지 마라. 기회를 잡자. 자주 자신을 보며 외우는 주문이다. 요즘엔 운동 겸 산책하러 자주 외출한다. 예전과 다르게 백수라고 집에만 틀어박혀있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간 김에 가성비 좋은 아아 한 잔 사 먹고 다이소나 마트에 들러 사람 구경, 물건 구경도 한다.    

  집에만 있으면 확실히 사회성이 떨어지고 부정적인 생각에 더 쉽게 사로잡힌다. 그래서 출근 대신 이런 외출과 쇼핑을 루틴화한 것이다. 힘들게 돈벌이 안 하고 맨날 쇼핑만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면서 그나마 이번엔 최소한의 사회적 백수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직장인이었다 백수가 되면 건보료가 꽤 나온다는데 번 돈 떨어질 때까진 다시 나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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