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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짹짹 Mar 29. 2021

목에 칼이 들어온 순간

우리 할머니는 겁쟁이 었다. 저녁 늦게 들어오다 내 새끼가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어제저녁 먹은 고기 때문에 배가 아프다는데 탈이 난 건 아닐까, 춥게 입고 자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할머니는 늘 우리 걱정에 전전긍긍하셨다. 


그렇게 걱정 투성, 겁 투성이었던 우리 할머니 목에 칼이 들어왔단다. 

일본 순사의 날카로운 검이 목을 짙눌렀단다. 




어린 아기를 등에 엎고 마당을 치우던 어느 날이었다. 땀과 피에 머리카락이 잔뜩 젖은 한 남자가 헐레벌떡 할머니 마당으로 들어왔다. 일그러진 얼굴과 흔들리는 동공,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자가 누구에게 쫓기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벌써 손발이 떨렸다. 남자는 땀에 젖은 손으로 할머니의 가느다란 손목을 움켜쥐고 제발 비밀로 해달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할머니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남자는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산 쪽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 발이 붙은 듯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뒤이어 일본 순사가 할머니 마당을 뒤엎을 듯 들이닥쳤다. 할머니는 일본말을 할 순 없어도 알아들을 순 있었다. 일본말을 알아들을 수 없더라도 그 남자를 찾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순사가 소리치며 할머니를 몰아세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져었지만, 일본 순사의 눈은 더욱 매서워졌다. 결국 칼 창에서 칼을 꺼내 할머니의 목에 붉은 피를 맺히게 했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벌벌 떨며 고개를 내 졌기만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할머니 등 뒤의 아기는 목청이 터져라 울어쟀겼다. 할머니는 두 팔로 아기를 꼭 쥔 채 고개를 바닥에 파묻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할머니에겐 영겁의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일본 순사들은 저 멀리 흙먼지를 내며 남자를 찾으러 갔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옆으로 쓰러졌다. 치마폭에는 오줌이 흥건히 젖어있었다. 무서워서 오줌을 지리는지도 몰랐다.




일본 순사의 칼날이 할머니에게 겨누어진 순간, 할머니는 영웅이었다.

자기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 할머니는 다른 생명을 살리려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할머니는 우리의 영웅이다.

우리 가족을 지켰던, 우리 삶을 보듬었던 위대한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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