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 친구라는 양면성에 대해서 물음을 던져 보기 좋은 영화
- 대인관계와 공감에 대한 이야기
영화 친구의 신드롬은 엄청났다.
영화에 나오는 노래를 물론이고, 대사와, 말투, 레트로 교복들까지 열풍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때가 그 시절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영화의 패러디물들이 이곳저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건달 영화는 있기는 했었으나 이 후로 화수분처럼 건달 영화들이 줄을 이어 개봉하곤 했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안에서 건달이 나오는 것은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당시에 친구 11명이서 이 영화를 보러 갔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좀 잔인한 장면이 많다"라는 느낌을 받으며, 영화의 결론에 공감이 가지 않는 나이였다.
"내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생각하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세월을 지나며 많이 하게 되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친구라는 존재는 성립된다.
서로의 경험과 다른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정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 보냄으로써 둘도 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 바로 친구다.
나는 편견 없이 친구들을 사귀었었다.
친구들과 속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서 술도 좋아하게 되었다.
친구와 술의 조합은 무적의 조합이었다. 대부분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고, 속상한 일들을 이야기할 때 남자들에게는 술 만한 것이 또 없었다.
수어지교, 금란지교, 관포지교, 죽마고우.. 친구에 대한 사자성어도 마음에 참 와닿는 나이였다.
서로 맞지 않는 친구는 세상에 없다.라고 자만 했던 바보 같은 나였다.
하지만 술을 게걸스럽게 먹어야만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남자가 아니고,
의리를 외치며 우정을 중시하는 것은 그만큼 불완전한(특히 10-20대) 삶의 시간에 당연한 것이고,
어릴 때 시간을 많이 보낸 것만으로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평생을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막 연애를 하는 친구와 이제 육아를 시작한 친구와는 공감을 나누기 힘들다.
서로의 처지가 달라졌음에도 친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공감이 많이 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공감 수치가 낮은 사람들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다 보니 힘들어한다.
정서가 차분한 사람들, 혼자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들이 보면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다.
물론 굉장히 활발한 사람도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도 혼자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어린 시절은 내가 오롯이 나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가기는 불안하니 친구를 사귀면 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혼자 노는 시간 즉, 혼자 생각해 보고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혼자 사유를 즐기는 사람이 연기를 잘한다는 건 일상 속에서도 홀로 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꿋꿋이 잘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닐까?
어느 유튜버는 근묵자흑이라는 말을 요즘 애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알고리즘에 비유하며 친구를 가려가며 사귀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요즘 세상은 관심이 있는 것을 넋 놓고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야기한다. 그것은 물론 친구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시대는 넷플릭스의 블랙미러 드라마처럼 ai가 우리 아이들의 친구가 될 수도 있으며, 점차 우리나라의 저출생 위기로 친구라는 개념이 많이 사라질 수도 있어 걱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공감은 더 중요하다.
공감은 내가 억지로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연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힘을 뜻한다. 사람들은 영화를 볼때 어두컴컴한 곳에서 두시간 가량 영화의 이야기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말은 20초도 듣기 어려워 하는 경향도 있다.
요즘에 말하는 MBTI에서 F와 T를 공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공감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곤 하는데, 참 이젠 나누다 나누다 별 걸 다 나눈다 싶다. (이걸 또 수치화해서 F 몇 프로? 까지 나누곤 한다.)
하지만 나도 이해를 못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람을 놀리며 웃기려는 것과, 남자들끼리 어디가 다치거나 하면 서로 놀리며 "그래야 찐친이지" 하는 것이 나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예전에도 이해가 가질 않았고,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
서로 자신의 말만 하려고 만나는 모임은 왜 만나는지 모르겠으며, 서로의 유대감을 가지고 교감을 하는 것이 나는 대화라고 믿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결국 술을 마시며 의리! 의리! 난리를 치는 친구보다는 1년 한 번이라도 만나 서로의 말을 잘 들어주는 진득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남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버는 돈 액수와 지위는 달라졌어도 하는 행동양식은 10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사회에서 가끔 보게 된다.
자격지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 불만을 이야기를 해야 본인이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헷갈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매너를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지키지 않는 사람도 존재하고, 사회에서 배운 가짜 매너를 진짜 본인이 예의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외롭다고 한다.
다시 영화 친구 이야기로 돌아와서
"내가 상대방을 생각하는 만큼 상대방도 나를 생각하면 참 좋겠다" 말 때문에 생긴 비극이 바로 친구 영화의 쟁점이다. 장동건은 결국 친구를 이해해 보려 했지만 유오성은 그런 친구를 이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신을 했다. 이것이 영화 친구를 보며 우리가 씁쓸하게 공감하는 이유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족으로 건달 영화는 대부분 남성성의 영화들이 주를 이루는지라, 남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지만 현실에서는 남자보다 여자들의 의리가 더 끈끈하고 멋있을 때가 더 많다.
내가 우울해서 빵을 샀어
T - 그 빵 어디서 샀는데? 그 빵 어디 있어? 몇 개 샀는데?
F - 왜 우울한데?
이 대화가 꽤나 유행하곤 했었다. 내 식대로 해석을 하자면, 이 대화에서
T는 공감하지 못하는 것에 공감을 하고, F는 공감하는 것에 공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