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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Feb 26. 2024

62. 엄마가 부끄러웠다.

눈치 보면서 식당을 피했던 못난 아들의 반성문

살아가다 보면 나이라는 게, 인생을 조금 더 살았다는 것이 정말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최근 내가 그랬다.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속마음은 한없이 부끄러웠다.



분명한 것은 서울로 조금 무리한 이사를 하고 금전적 부담은 늘어났지만, 엄마 동생 그리고 나는 행복해졌다. 작년 여름 끝자락에 운명처럼 상황에 딱 맞는 집을 구하고 잔금을 맞췄다. 물론 이사 일정이 조금 맞지 않아 동생은 찜질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 또한 육체적으로 고된 시간을 보냈다. 짐을 싸고 풀기 위해 직장에 눈치 봐가면서 휴가를 내고 또 냈다. 이렇게 지금 여기에 정착한 후 시간은 반년이 흘렀다.


물론 아직도 아침마다 고생해서 엄마를 센터로 보내는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하지만 행복해 보이고 만족스러워하기에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나도 서울에 가는 횟수가 많이 늘어났다. 아직도 장거리 운전은 부담되고 힘들다. 한번 다녀오면 피로가 일주일 넘게 머물다 간다. 그래도 지나가는 시간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혼자 올라온 서울이지만 명절이라서 기분을 내고 싶었다. 하소연을 브런치에 쏟아냈지만 억지로 끌고 다닐 수는 없기에 가족과 딸은 내버려 두었다. 동생은 내 마음을 아는지 그냥 이해해라고 위로를 건네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하는 건 형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맞는 말이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명절에 엄마를 모시고 어디 가면 좋을지 동생에게 물어봤다.


주간보호센터를 가지 않는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엄마는 유독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신다. 습관적인 행동인지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 그런지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행동으로 표현하기에 엄마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 형제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끔은 혼자 옷을 걸치고 현관문 앞에서 서서 우리를 한참 쳐다보기도 한다. 이번 명절에도 집에만 있으면 분명 그럴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리 셋이지만 어디든 나가고 싶었다.


사실 그다지 반겨주는 곳은 없다. 친척집이나, 엄마 친구네 등등 이런 가족의 향기가 넘치는 곳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억지로 찾아가면 사람들 속으로 갈 수 있겠지만 초대 없는 곳에 먼저 전화해서 가는 건 아닌 듯싶기에 찾아가는 것을 제외시켰다.


이렇게 하나씩 둘씩 가면 안 될 이유를 말하다 보니 엄마를 모시고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고민하는 나를 보고 동생은 그냥 주변 식당에 모시고 나가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소파에 누워서 룸으로 된 주변 식당을 검색했다. 동생도 나름 검색을 하는 것 같았다. 몇 분이 흐르고 동생에게 말했다.


"룸이 있는 식당이 여기 주변에 없는데...."


잠시 침묵이 흐르고 동생이 말했다.


"왜? 룸?"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그랬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예민한 성격 때문인지 나는 이런 불편한 상황을 스스로 피했다. 직장에서도 내가 무엇을 모르면 피해를 줄까 봐 야근을 했고, 몸이 아파도 중요한 시기에 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고생할까 봐 참고 참다가 병을 키웠다. 미련하고 살면서 도움이 안 되는 성격인 것을 알지만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그렇게 나를 몰아갔다. 그러다 보니 엄마를 모시고 식당에 가면 다른 손님들이 불쾌해할까 봐 신경을 썼다.


사실 그런 눈초리를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나름 잘 씹어서 드시지만 한동안 이빨이 좋지 않을 때는 모든 음식을 씹고 뱉어버렸다. 식탁 위에는 엄마가 먹다가 버린 음식들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이런 모습을 옆 테이블에서 지켜보며 비위 상한다는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을 몇 십 번은 목격했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내가 다른 손님이라도 기분이 별로일 것이다. 돈 내고 식당 와서 맛있게 먹으려고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감정이 상할 것이다. 역시 남들에게 피해 주는 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엄마는 버린 음식을 다시 입으로 넣고 오물오물 먹곤 했다. 자식인 내가 봐도 가끔은 불편했다. 그래서 적어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어느 순간부터 비싸도 독립된 공간이 있는 식당만 찾아다녔다.


동생에게 이런 말을 정확히 한 적은 없다. 그래서 동생이 왜 안되냐는 말에 답변을 쉽게 할 수 없었다. 대신 날씨가 추우니까 차를 타고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동생은 시내에 살고 있으니 엄마 모시고 걸어가자고 했다. 5분만 걸어서 내려가면 식당이 정말 많았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이곳으로 이사 오고 단 한 번도 엄마를 모시고 걸어서 식당을 간 적이 없다. 밖에서 먹으면 차를 타고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에 들려서 먹거나 시켜서 먹었다.


동생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충분히 같이 시간을 보내자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엄마가 아직 걸어 다닐 수 있고, 우리와 눈을 마주칠 수 있고, 엄마가 대소변을 실수해도 가끔은 스스로 변소를 가기도 하고, 엄마가 음식을 드시기도 하는 이런 평범함이 아직은 존재한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는 그 어른스럽고 엄마를 배려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감동받았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그럼 추우니까 옷 단단히 입혀서 걸어서 가자고 했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엄마가 걷기 힘들어하면 우리가 업고 가면 되고, 식당에서 음식을 뱉으면 휴지로 잘 덮어두면 그만이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들 의식하느라고 가장 소중한 우리 엄마를 외면하는 그런 모자란 행동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옷을 입혀드리고 목도리에 장갑까지 무장시켜 드리니 자동적으로 엄마는 현관문으로 향하셨다. 그리고 나가기 위해 잠바를 입고 있는 우리 형제를 보고 밝은 미소를 보내셨다. 누가 보면 몇 달 동안 집에만 있었던 것 같은 오해를 받기 딱 좋은 미소였다. 밖으로 나와서 우리 형제는 양팔에 팔짱을 끼고 엄마를 놀리기 시작했다.


"김여사.. 누가 보면 감금시켰는 줄 알겠네."

"엄마. 추워?"

"김여사. 소고기가 좋아? 돼지고기가 좋아?"


엄마는 그저 정면을 응시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형제들만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무반응이지만 엄마 표정을 보면 아직 생각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종종 느낄 수 있다. 미소로 대답하기도 하고, 무표정으로 대답하기도 한다. 자기 표현하는 방법을 잊었지만 그렇다고 감정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마도 이런 장난과 공감은 엄마같이 중증치매 환자분들에게 정서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요양원에 있을 때는 이런 미묘한 감정표현이 거의 없었다. 가끔 면회를 가면 그냥 두 눈을 감고 좋아하는 음식만 먹을 뿐이었다. 사실 그곳에서 누가 우리처럼 엄마를 애정을 다해서 돌봤을까? 그럴 수 없으니 엄마의 마음도 닫혀버렸던 거 같다.


식당까지 가는 동안 엄마가 이렇게 행복할지 몰랐다. 혼자 올라와서 사실 기분이 참 별로였는데 이 모습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도 좋아하고, 동생도 좋아하고 이렇게 우리 셋은 살아가고 있으니 더 이상 뭐 바랄 것도 없어 보였다.


걸어서 10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이렇게 짧은 거리인데 뭐가 눈치 보여서 그동안 배달음식만 시켰는지 한심했다. 우리는 겉보기에 동네 맛집으로 보이는 소고기 식당으로 들어갔다. 연휴라 그런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룸이 없기에 다른 테이블 옆에 함께 앉았다. 곧 한가득 반찬들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음식을 보자 엄마의 동공은 확장되었고 젓가락이 아닌 정교한 손가락을 움직여서 먹고 싶은 음식만 포착하기 시작했다.


요양원에서 나오고 정말 좋은 점은 엄마의 식욕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동생의 노력에 대한 결실이자 엄마가 우리에 보답해 주는 선물이었다. 무엇보다 요양원이 아닌 집으로 와서 적응한 후 엄마 마음이 편해진 것이 가장 컸다. 엄마는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보호센터에서 집에 도착하면 행복하게 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온기가 있는 집으로 올라온다. 현관문을 열면 언제나처럼 냉장고와 몇 초간 치열한 눈싸움을 하고, 닫쳐있으면 바로 소파에 가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눕는다. 그리고 잠시 TV를 보다가 동생이 차려주는 저녁밥을 먹고 엄마방으로 가서 또 편하게 쉰다. 밥 먹는 것을 비롯해서 세탁, 청소 그리고 모든 집안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내가 서울로 올라오면 입고리를 올려서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신다.


나는 가만히 엄마가 음식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남들 눈치를 본 걸까? 이토록 외식을 좋아하고 행복해하는데 왜 나는 그리 못난 생각을 한 걸까?

평생 다시 마주치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엄마를 가둬둔 것만 같아서 죄책감이 몰려왔다. 겉으로 효자인 척 하지만 못난 자식 그 자체였다.


엄마는 소고기까지 천천히 드셨다. 조금 배가 찼는지 엄마 주특기인 두 눈 감고 음식 씹기를 계속했다. 나는 동생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런 엄마를 바라봤다. 지금 남은 우리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 감사했다.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정말 소중한 것이다. 떠올려보면 못난 짓을 많이 했던 아버지도 떠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돌아가실 때 이제 사고 칠 사람 없으니 후련하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가끔 미치도록 그립게 보고 싶다. 그 목소리, 그 표정, 살짝 굽었던 등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던 그 알 수 없는 눈빛.


하지만 이내 현실로 돌아온다. 다시 볼 수 없음을 인지한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하는 이 시간에 더 많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지독한 그리움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그 아쉬움을 덜 남기기 위해서.


엄마의 팔짱을 끼고 어두워진 동네를 걸어서 다시 아파트로 향했다. 살짝 언덕이라서 엄마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엄마는 씩씩하게 언덕을 올랐다. 날씨가 추웠는지 고개를 목도리 사이에 푹 넣어두고 가끔 우리에게 미소를 보이며 고맙다는 말을 대신하고 계셨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motherstory

https://brunch.co.kr/brunchbook/mylifeis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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