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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Mar 19. 2024

63. 딸보다 아들이 훨씬 좋더라.

치매환자인 엄마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

동생이 최근에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엄마가 참 컨디션이 좋아.."


사실 나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냥 속 깊은 놈이 형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말쯤으로 여겼던 거 같다. 치매 환자가 증상이 좋아진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맞장구 쳐주며 흘려들었다. 그냥 엄마가 요양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해서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고 동생이 같은 말을 반복하자 조금은 궁금해졌다. 아니 궁금보다는 동생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몇 주전만 해도 매일 같이 아침이면 실수를 해서 목욕을 시키고 이불을 빨래하고, 똥 묻은 엄마 엉덩이를 씻겨드리며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동생은 지쳐있었다. 하지만 요즘 엄마는 그런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고. 그리고 식사도 잘하시고, 새벽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했다.


나한테 오히려 상태가 호전된 지금 이 상태가 두렵다고 말하는 그 말속에는 진심뿐이었다.


"진짜? 그렇게 좋아졌어?

"응. 형도 와서 한 번 봐봐. 참 신기하네.."


나는 직접 봐야 한다는 그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물론 마음은 매주 올라가서 엄마랑 동생을 보고 싶다. 엄마가 존재하는 그리고 동생이 살고 있는 그 집은 내게 사실 안식처 같은 곳이다. 그래서 다녀오면 피곤해도 올라가면 힐링이 된다. 그런데 최근 너무 신경 쓸 일이 많이 생기고 정신이 없었다.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일은 심적으로 내게 많은 부담을 주었고, 그 결과 뭐 별로 가진 것도 없지만 자산을 처분하기로 결심하고 여러 가지 정리를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급하면 꼭 뭔 일이 생긴다고 법적인 문제까지 발생하고 원하는 데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물론 세부적으로 사정을 들어보면 너무 걱정할 일도 아니다.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욕심이 앞서 혹시나 내가 실직자가 돼서 무너지면 어쩌나 괜한 걱정이 나를 압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형의 사정을 알기에 동생은 가끔 정답도 없는 나의 계획과 잘 안 풀리는 일들을 들어주면 조용히 묵묵히 새 출발을 응원해주곤 했다. 하지만 왠지 모든 일을 뒤로하고 서울로 바로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동생이 봤으면 좋겠다고 한 그 주에 바로 서울로 향했다. 만약 엄마의 상태가 정말로 호전된 거라면 그 이유를 알고 싶기도 했다. 심리적인 안정이 영향을 준 것인지, 동생의 지극정성이 어떤 기적을 일으킨 것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의 컨디션이 좋을 때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나누고 싶었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출발한 나는 자정이 되어서 겨우 서울에 도착을 했다. 동생 나이보다도 늙은 아파트의 주차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주차자리를 겨우 찾고 이중 주차를 하고 소주 2병을 들고 현관문 비번을 누르고 들어갔다. 집안은 온기로 가득했다. 구축이지만 단열이 정말 잘된 터라 집안은 항상 따뜻했다. 작년 여름에 이사 올 때 혹시나 엄마가 추울까 봐 난로에 여러 가지를 준비했는데 집안이 쾌적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도착하자 동생은 내 가방을 들어주었고, 미리 시켜둔 야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 시간이 미치도록 행복했다. 동생은 조잘조잘 엄마의 호전된 건강상태와 직장이야기를 했다. 나도 최근 정리하고 있는 문제들을 이야기했고 우리는 새벽 2시가 넘어서 서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한주의 피로를 끌어안고 꿀잠이 들었는데 발바닥에 뭔가 감촉이 느껴졌다. 꿈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실눈을 떴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비몽사몽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니 엄마가 소파에 누워서 소파 위에 올려둔 내 다리를 어루만지며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추는지 내가 덮고 있는 이불도 소파 위로 끌어올리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새벽 5시에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나지막하게 엄마한테 인사를 하고 일어나서 엄마에게 내 이불을 덮어드렸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누웠다. 나도 다른 이불을 가져다 잠이 들었고 아침 햇살과  함께 눈을 떴다. 우리 셋은 그렇게 모두 9시가 넘도록 늦잠을 잤다. 편안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주말을 시작했다.


부시한 꼴로 엄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표정이 상당히 밝아 보였다. 그리고 아침에 실수도 하지 않으셨고, 화장실도 두 발로 혼자 잘 가셨다. 물론 아직도 사탕을 달라고 졸랐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볶음밥을 야금야금 잘 드시는 것이었다. 입이 짧아져서 이것저것 많이 시도했지만 별로였는데 입맛이 돌아왔는지 엄마는 숟가락까지 사용하면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한 입 넣고 맛을 음미하시는지 두 눈을 감고 천천히 음식을 씹어 드셨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뭔가 모를 행복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엄마 피부도 좋아 보였다. 혈색이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고 자세히 보니 살도 조금 붙은 것 같았다. 27kg까지 내려간 체중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동생과 나는 치매도 치매지만 계속 빠지는 체중 때문에 더 걱정하곤 했다. 이게 사람 몸무게가 맞냐면서 엄마가 두 다리로 걷는 것도 기적이라고 우리는 종종 말했다. 그런데 분명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집을 돌아다니다가 눈이 마추지면 우리에게 눈 웃을 치기도 했다.

나는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왜 동생이 나보고 올라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웃음, 엄마가 식사하는 모습, 엄마가 편히 쉬는 모습.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던 모습인지 모른다. 물론 엄마랑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예전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도 듣고 싶고, 엄마가 진지하게 설명해 주는 드라마 스토리도 듣고 싶다. 사실 이제는 잘 기억도 안 난다. 어떻게 엄마가 말을 표현했는지 말이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비디오라도 많이 찍어둘걸..' 이런 후회를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게 가까운 기억만 생생하다. 물론 기억 저편에는 오래된 뭔가 흐릿한 것들이 잔상처럼 남아있다. 하지만 또렷하지는 않다. 지금 내가 그렇다. 엄마의 아픈 모습이 예전에 건강했던 시절에 엄마와의 추억을 다 덮어버려서 흐릿해졌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더 좋아진 엄마 모습을 보고 있으니 행복하다.


그날 저녁 나는 동생과 여러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왜 좋아졌는지 원인도 이야기해 보고 내가 퇴직하게 되면 우리 셋이서 여행을 가는 것도 이야기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면 되니까. 그리고 다행이라고 말했다. 만약 엄마를 계속 요양원에 모셨다면 지금처럼 엄마가 조금이라도 호전된 모습을 우리는 절대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동생은 자기가 조금 힘들어도 지금이 너무 좋다고 했다.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그놈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미안함이 파도처럼 몰려왔지만 그냥 웃음으로 대신 답했다.


일요일 아침 엄마는 이상한 옷들을 찾아서 입고 장갑을 끼고 현관문 앞에서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그 미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집이 답답하니 나가자는 유혹의 손짓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엄마를 보고 웃었다. 엄마를 사탕으로 유인해서 지금 말고 조금 있다가 나가자고 현관으로 가서 모시고 왔다. 엄마는 사탕이라는 말에 외출을 포기하고 우리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두 아들을 양쪽에 두고 외출 나가는 것...


그것이 건강하실 때 엄마의 유일한 자랑이었다. 돈도 없고, 남편 복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당신에게 유일한 자랑거리. 바로 다정한 두 아들이었다. 자신이 일하는 이마트를 가서 괜히 물건도 안 사면서 우리를 자랑삼아 보여주곤 했다. 그 유치함이 웃겼지만 엄마한테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 당시에는 너무 없어서 우리는 엄마가 마트에 가자고 하면 모른 척하고 따라나섰다.


엄마는 항상 자기는 딸 가진 친구들 한 번도 부러워해본 적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기에 믿었다.


 우리랑 영화를 보러가고, 마트를 가고, 가끔 여행을 가면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했다. 물론 그 시간이 길었다면 좋았게지만..


아직도 엄마가 행복하다면 우리 형제는 언제든 같이 모시고 나가려 한다. 아마도 그 기억이 엄마에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아픈 지금도 우리에게 나가자고 손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아들 자랑하고 싶어서..




https://brunch.co.kr/brunchbook/mymotherstory


https://brunch.co.kr/brunchbook/mymather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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