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와 함께 살면 빨래가 늘어난다.
동생이 서울로 이사를 올 때 우리는 최소한으로 돈을 지출했다. 이사도 반포장으로 하고 가전이나 가구들도 기존 세입자분들이 두고 간다고 해서 받아서 사용하기로 했다. 나름 상태가 괜찮은 소파, 붙박이장, 세탁기, TV, 식탁을 두고 갔다. 이사를 마치고 보니 TV는 고장 난 것이라서 버렸고, 소파는 리클라이너 기능을 사용하려면 한샘에 연락해서 부품을 사야만 했다. 하지만 가죽 상태는 좋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
다행히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치와 거리를 두고 산 덕분인지 큰 거부감은 없었다. 단지 내 마음은 조금 불편했다. 이왕이면 모든 것을 새것으로 맞춰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래도 나중에 동생 놈이 결혼하면 그때 더 좋은 다른 것들로 채우는 것이 오히려 좋겠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그렇게 이사를 마쳤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벌써 엄마를 요양원에서 데리고 온 지 반년 하고도 몇 개월이 넘었다.
물리적인 거리감 때문에 나는 잘 올라가면 한 달에 2번 서울에 가고, 바쁘면 한 달에 한 번도 못 올라간 적도 많았다. 요양원에서 엄마를 모시고 오면 동생은 주말에 우리 집에 종종 모시고 올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많이 했지만 막강한 형수의 거절로 그 작은 바람은 처참히 좌절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엄마를 모시고 내려오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통화를 남자 형제치고는 참 많이 하는 편이다. 물론 수시로 카톡도 보낸다. 꼭 엄마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잡다한 하소연 등등 5살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예전에도 친했지만 엄마가 아프고 우리는 인생의 동반자 그 이상이 되었다.
그런데 잠잠했던 어느 날(한 달 전쯤) 동생이 영상하나를 카톡으로 보냈다. 전 주인이 사용하다가 두고 간 드럼 세탁기에서 연기가 나는 심란한 영상이었다. 단 한 번도 드럼 세탁기를 사용해 본 적 없는 통돌이 인생이라 기존에 엄마가 구매했던 통돌이를 버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세탁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근데 엄청난 소음과 하얀 연기를 동반하며 주체하지 못하고 세탁기는 미친 듯이 돌고 있었다. 나는 영상을 보고 세탁기가 치매에 걸렸다고 농담을 던졌지만 더 이상 사용하면 큰 일 날 것 같았다.
군대에서 온갖 장비들을 수리업체에 의뢰하고 때로는 고치는 했기에 증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은 연식을 보여주며 이 세탁기도 갈 때가 된 것인데 우리가 받은 것 같다면서 새로 살지 고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돈을 줄 테니 하나 새로 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고 싶은 느낌이라서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불탈 것 같은 세탁기는 이후 잠시 잠잠해졌지만 이내 똑같은 증상을 보였고, 동생은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기사분을 불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사분께서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엄마 때문에 세탁물이 많아서 거의 매일 세탁을 하기에 나는 더 안쓰러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가 대변과 소변 실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부터 하는 동생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 벽은 아지만 이미 침대에는 똥칠을 몇 번 했기에 엄마의 증상은 분명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생리적 실수 때문에 빨래를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탁기 완전 고장 나면 집안은 온통 냄새로 진동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결국 세탁기를 새로 사기로 결심했다. 나도 그렇고 동생도 세탁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좋은 것부터 중저가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모델을 비교하고 며칠 동안 통화했다. 동생은 처음에 세탁기만 사려고 생각했지만 내가 이왕살 때 건조기도 사라고 부추겼다. 지금까지 한 번도 건조기를 사용해 본 적 없기에 그 편리함을 몰라서인지 동생은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했다. 나는 직장에서 종종 건조기를 돌렸을 때 시간도 절약되고 좋았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동생을 설득했고, 우리는 다시 건조기와 세탁기로 구성된 세트를 살피고 살폈다.
그 사이 사용하던 세탁기는 거의 죽음을 향해 질주했다. 어렵게 모델을 골랐는데 문제가 하나 더 발견되었다. 바로 우리가 원하는 용량의 건조기, 세탁기를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대소변 실수 등을 생각할 때 이불 빨래랑 옷의 양을 생각하면 그래도 소형보다는 중형이나 그 이상을 사는 게 좋았는데 세탁실이 베란다에 없고 화장실 안에 있는 오래된 구축(87년식)이라서 화장실 문보다 큰 것은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찾고 찾아서 조금 작은 용량의 제품을 구매했다. 없는 돈이라도 만들어서 주려고 했지만 동생은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억지로 돈을 주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알겠다고 동생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동생 여자친구가 일부분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힘듦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생의 짐은 줄어들기에 참 고마운 사람이랑 사랑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화장실에 안에 2단으로 세탁기와 건조기가 설치되었다. 동생은 설치가 완료되고 사진을 찍어서 내게 공유했다. 완전 최신 모델은 아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 들과 비교하면 최신식이나 다름없었다. 동생은 여러 기능들을 숙지했고, 용량이 조금 적은 것 말고는 사용하는데 매우 편하다고 만족하는 듯했다.
특히 건조기를 몇 번 사용하고 감탄을 계속했다.
"형... 수건이 정말 뽀송뽀송하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나는 공감해 주었지만 이내 속이 쓰렸다. 만약 엄마가 건강하셨다면 그래서 건조기를 사용해 봤다면 지금 동생보다 몇 배는 더 좋아했을 텐데 엄마는 태어나서 이렇게 치매가 올 때까지 건조기를 집에서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효도를 한다고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엄마가 건강할 때 마지막 집은 빌라였고 신축이었지만 집에 건조기를 둘 곳은 없었다. 그래서 작은 베란다에 김치냉장고와 세탁기를 넣고 사용하셨다. 그래서 빨래는 항상 거실 한 구석 행거에 매달려 있었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끔 집에 오면 거실에 앉아 좋아하는 연속극을 보면서 빨래를 정리하는 그 모습이.
이토록 그리워질 거라고는 그 당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당연한 듯 빨래통에 입었던 옷을 던져버리는 그런 무심한 아들놈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엄마는 빨래와 집안일에서 완벽한 해방을 하셨지만 그 해방의 과정이 평범하지 못하기에 마음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위안이라면 동생의 집안일이 조금 줄어든 것이었다. 맨날 퇴근하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엄마가 오면 외출도 못하고 꼼짝없이 집에 엄마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생이 엄마만큼이나 불쌍하다. 물론 요양원에서 집으로 모시고 오는 것을 선택한 것은 우리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가끔 주말에 올라가면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고 정신없는 모습에 다시 집으로 내려오는 발걸음은 언제나 무거웠다.
그런데 건조기를 쓰면서 빨래하는데 시간이 줄었다고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고 말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사용했던 건조기를 지금 사용하는 모습도 짠했다(물론 지금 우리 집도 건조기는 없지만... 아내가 싫어해서).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온다. 벌써부터 덥다. 작년 8월 이사를 했으니 벌써 1년이 다되어간다는 소리기도 하다. 그 사이에 잔잔하게 우리는 새로 이사 온 집에 정을 붙이고 추억을 만들고 있다. 엄마는 완벽하게 센터에서 돌아오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주변에 맛집도 찾았고, 주변 풍경도 익숙해졌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감이 나중에는 그리워질 것을 알기에 그 모습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서 바둥거린다.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물론 불치병에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앞서 고생하고 있으니 동생 인생도 그리고 내 인생도 나중에는 조금 더 웃을 일들로 넘쳐나기를 어느 봄날 기대해 본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mother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