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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Oct 07. 2024

72. 아침에 일어나니 쓰러져 있는 엄마

24년도 추석의 우리 형제에게 가장 아픈 명절이었다.

추석이 어느덧 한참 지나버렸다. 그동안 나는 감히 브런치를 열고 글을 쓸 수 없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엄마의 투병에 대해 담담하게 글로 기록 남겼다고 하더라도 나 또한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기에 아픔을 품은 상태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글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조금 힘든 순간의 기억들은 충분히 내 가슴에 품고 한없이 눈물을 흘린 후에야 이곳에 써왔다. 


아마도 오늘 이 글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내 가슴의 눈물을 그리고 겉으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참으로 애석하게 나는 71화 글을 쓰면서 나름 행복했다. 엄마가 우리 형제가 하는 말도 따라 하고 컨디션도 너무 좋아서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 아프면서도 좋았다. 그래도 과자를 달라고 조르고 새벽에 수십 번 일어나서 밤의 적막을 깨며 냉장고 시위를 하는 엄마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이번에도 역시나 우리 편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다면 저 위에 계신 그 누구라도 내게 귀띔이라도 해주셨다면 그랬다면 나는 더 오랜 시간을 엄마와 함께 했을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사고나 나기 일 주 전에 동생이 일정이 생겨 엄마와 함께 주말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토록 그리워질 것을 못난 놈인 나는 조금 엄마가 귀찮았다. 그 넘치는 에너지를 보며 치매가 정말 주변 사람들을 죽이는구나 싶었고 우리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이기에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는 나는 그다지 엄마한테 따뜻하지 못했다. 그것이 온전히 걸어 다니는 엄마를 씻겨드릴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깨끗하게 씻겨드릴 걸 하고 후회를 했다. 물론 후회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에 짐작하듯이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기에 더 슬프기도 하다. 


엄마와 나눈 그 주말이 이토록 그리워질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사실 72화는 내가 엄마와 보낸 2박 3일을 쓰려고 했었다. 그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 마음 아프다. 


지금 엄마는 중환자실을 거쳐 재활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추석 전날 서울에 볼 일도 있고 처리해야만 하는 은행업무가 있어서 나는 하루 전날 올라가기로 계획을 했다. 이왕 간 김에 며칠 쉬면서 동생과 엄마랑 같이 긴 연휴를 보낼 계획도 세웠다. 거창할 것은 없었다. 그냥 엄마를 모시고 아빠 납골당에 다녀오고, 주변 좀 돌아다니고, 엄마의 끝없는 해방을 견디며 동생과 저녁에 집에서 배달음식을 먹는 그런 소소한 계획이었다. 그래서 나름 명절이 기다려졌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나는 순간 불안한 느낌에 전화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가 온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몸도 그것에 반응했는지 '내 동생'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밀려오는 모든 잠을 깔끔히 정리시켰다.


동생의 목소리는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들었던 목소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엄마가 변기 세정제를 먹고 응급실에 갈 때도, 엄마가 펜션에서 실종되었을 때도, 엄마가 넘어져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할 때도 이렇게 떨지 않았다. 


나는 순간 최악을 떠올렸다. 말이 씨가 된다고 괜히 그런 소리를 했나 나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사실이 그랬다. 엄마가 죽을 복이라도 있어서 그냥 아침에 일어났을 때 조용히 이 세상과 작별하셨으면 하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두 아들 힘드게 했으니 그냥 가실 때는 편하게 고요하게 떠나 주셨으면 했다. 장기간 입원해서 마음에 바위보다 더 큰 짐을 두고 시간을 보내게 하지 말라고.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말했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나는 동생에게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물었다. 동생은 엄마가 움직이지 않는데 의식은 있고,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119에 전화했고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만 반복했다. 엄마를 처음 발견 했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진정한 후 내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동생에게 나는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듣고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듣지 않으면 미친 듯이 이기적이지만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 테니 평생 알고 싶지 않았다. 물론 얼마나 당황했을지 동생에게는 미안했다.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 방에 갔을 동생이 그 엄마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을지 나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동생은 나름 병원밥을 먹을 경력을 살려 의료 상식을 동원해 엄마를 무사히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듯했다. 119 구급차를 탔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부지런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의료대란에 난리인데 걱정이 되었지만 이 땅 위에 사는 보잘것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라마처럼 너무 잘나서 어디 전화 한 통화하면 의료진이 엄마를 기다려주면 좋으련만 우리처럼 태생이 평민 이하인 사람에게 그런 현실은 불가능했다. 사 짜로 끝나는 사람들과의 인맥도 없고 이런 급박한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개도 없었다. 

그냥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먹고사는 것 , 내가 만든 이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내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 모두 싫었다. 왜냐면 나는 짐을 싸서 바로 병원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러 가지를 정리해서 이것저것 할 일들이 있었다. 오늘은 그중 한 가지 일로 은행에 가야만 했다. 상담이었고, 일정을 변경하면 금전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기는 일이기에 나는 엄마가 쓰러져 응급실로 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에 도착한 나는 정신을 어디에 넣어 둔 사람처럼 멍하니 행동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서둔 이유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내 앞에 예약한 사람들을 처리하느라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지나서야 겨우 상담창구에 앉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엄마가 쓰러졌다고 사정을 봐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세상은 그냥 각자의 기준에 맞춰 돌아간 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런 부탁이 사치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창구에서 준비해 온 서류를 직원에게 넘기고 대출을 위해 수많은 페이지에 서명을 하면서 나는 꽤 오랜 시간 그곳에 있었다. 그 사이에 걱정이 되어 동생에게 종종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충분히 응급실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갑자기 이 나라 꼬락서니가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혹시 병원에서 거부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그 뉴스에서 보던 현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의사라는 위대한 직업을 가진 그분들이 어떠한 대의를 위해 하는 그 행동에  약자인 우리는 그냥 또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물론 의사분들도 정부가 문제라고 말하며 타당성을 주장하겠지만 언제나 내 입장이 중요하니 내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과 연락이 닿지 않아서 상상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이지, 동생이 응급실에 엄마를 모시고 들어갔는지, 지금 엄마가 응급 수술을 받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기에 더 답답했다. 그냥 빨리 은행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1시간 20분쯤 걸려서 거의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주택담보 대출이 아니라서 조금 더 까다로웠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데 그때 직원이 내게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작업을 치기 시작했다.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니라서 당황스럽지도 않았지만 상황이 나를 조금 날카롭게 만들었다. 


내 사정을 모르는 직원은 최대한 친절하게 카드랑 외화 통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나는 시간이 걸리냐고 물었고 직원은 몇 분 안 걸리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몇 분도 내게는 몇 년처럼 느껴지기에 직원에게 나중에 이 부분은 내가 꼭 다시 와서 해드리겠다고 했다. 이것저것 준비하면 여기 직원도 고생한 것이 분명 있기에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싶었다. 단지 지금만 아니면 되었다.


직원은 내 말을 못 믿는 듯한 표정과 약간의 불쾌감을 섞어서 정말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고 강조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엄마가 쓰러졌데요. 제가 병원을 가야 해요.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거짓말 아니니 걱정 마세요."


나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그 직원은 당황한 듯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나는 인사를 하고 빠르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려가면서 계속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혹시 지금 마지막 순간을 향해서 엄마가 이 세상과 작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계속 병원 응급실에서 거부를 당하며 다른 곳들을 향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답답했고, 그 답답함은 내 가슴을 억눌렀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거는데 이대로 운전하면 사고 날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은 갑자기 엄마와의 추억을 가득 채워졌다. 


어린 시절 내가 말썽을 피우면 파리채와 빗자루를 들고 나를 혼냈던 모습부터, 처음으로 간 여행, 내가 자퇴할 때 내 옆에서 나를 믿는다고 괜찮다고 말하던 그 모습, 사춘기가 되고 첫 연애에 실패하고 울고 있는 내게 썩소를 날리며 진상이고 하던 터프함, 학교에 안 가겠다고 아침에 지랄지랄하며 치고 다시 이불로 들어간 내게 물병을 부어 폭격했던 그 날, 내가 운전을 배우고 처음으로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탄 엄마의 표정, 외국인 여자친구를 만나고 있다고 했던 날 나를 바라보던 그 모습, 손녀딸이 태어나고 좋아서 웃고 있는 그 모습 등등..



엄마와 함께 한 40년이 한순간에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잘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한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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