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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향기 Jul 31. 2022

아이를 키우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다.

육아 에세이_같이 자란다 01.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일출_2022.7.18


2013년 첫째를 낳고 맞벌이 부부의 일상이 시작되며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당시 남편은 대전에 있는 한국 과학기술원에서 박사과정 마지막 연도였고 나는 2014년 3월 1일 자 복직을 위해 준비 중이었다.


학교 기혼자 기숙사 아파트에 살고 있던 우리는 내 근무지로 이사를 왔고, 큰 아이는 10개월에 자기보다 큰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었다.



다행히도 인복이 많았던 나는 너무도 좋은 어린이집 원장님과 선생님 덕분에 아이의 적응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3월 1일 자로 복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완료기 이유식을 진행 중이었던 첫째의 어린이집 가방에는 늘 집에서 퇴근 후 끓여서 식혀 놓은 이유식 2개를 넣어 보냈다.


그렇게 11개월 아이의 사회생활은 가장 먼저 등원을 하고 가장 늦게 하원을 하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해야 하는 엄마였기에 아침 등원은 늘 아빠의 몫이었다.

캘리포니아 Muri wood 2022.7.15


남편은 백팩에 노트북과 논문을 싸 짊어지고 한 손에는 첫째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이유식이 2개 들어 있는 어린이집 가방을 잡고 어린이집이 문을 여는 아침 8시에 아이를 맡기고 대전으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어떤 날은 원장님이 길이 막혀 조금 늦으시면 남편도 덩달아 출근이 늦어지고는 했다.


특히나 중요한 미팅이나 교수님과의 회의가 있는 날 이런 아침에 지체가 되면 나까지 괜히 불편한 마음이 들고는 했지만 다행히도 남편은 아무런 불만 없이 아이를 맡기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했다.



오후 4시 30분


공식적인 퇴근시간이 되면 나는 부리나케 가방과 노트북을 차에 내던지다시피 하며 25분 운전을 해서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등원은 아빠가 하원은 내가 담당했기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교문을 나와야 했다.


만약 그날 우리 반에 아이들끼리 싸움이 났다거나 운도 정말 없이 종례 후 또는 청소시간에 사달이 나면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아이가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없는데, 마음이 너무나 급해지며 종종걸음으로 교무실과 교실을 왔다 갔다 하며 속절없이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시계만 쳐다보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남중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이런 변수는 다 반사였다.


그래도 지금 이 녀석들이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내심 반갑고 대견하다.


강력한 테스토스테론에 지배된 남자아이들은 툭하면 싸우고 툭하면 창문이 깨지기 일쑤였다.


이 또한 엄청난 인복으로 학년부장님을 잘 만나서 

"엄 선생, 얼른 가서 애 찾아. 내가 해결할게." 하며 등 떠밀리다시피 학교를 빠져나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요즘도 종종 연락하는 부장님께

"저 올해 휴직해요 부장님, 만나서 밥 먹어요. 제가 내려갈게요."


"오긴 어딜 와, 내 애 잘 키우는 게 세상 최고야.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 하는 일 내조 잘하고 선생님도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살아. 우리는 더 늦게 봐도 돼. 일부러 여기까지 안 와도 이렇게 목소리 듣고 살면 얼마나 좋아. 오지 마, 온다고 하면 나 화낼 거야."



그렇게 전쟁 같은 퇴근시간을 거쳐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0세 반에 있는 첫째와 다른 여자 친구 딱 둘만 남아있고 다른 큰 형님들은 이미 다 하원을 한 뒤였다. 여자아이 부모님도 맞벌이였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둘이 항상 같이 있어서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 되고는 했었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떤 날은 열이 펄펄 끓어 도저히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었는데 남편은 한참 논문 데드라인이라 집에도 며칠 못 들어오던 날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40분 거리에 계신 친정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일이었다.


새벽 6시

"아빠, 오늘 큰 택이가 열이 너무 많이 나는데 지금 와주실 있어요?"

그럼 열일 제쳐두고 아빠랑 엄마는 달려와서 큰 아이를 친정집으로 데려가 주셔서 병원도 데려가고 돌봐주셨다.


그런 날은 나도 퇴근을 자동으로 친정으로 하였고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


아이가 어리니 밤에 잠을 푹 잘 수도 없고 아프기라도 한 날에는 정말 정신을 못 차렸다.



아침에 출근을 해서 믹스커피 2 봉지를 머그잔에 부어서 먹는 나를 바라보던 옆반 수학선생님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자녀가 그때 당시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던 수학선생님께서 나를 보며


"선생님 지금 너무 힘들지? 아기들 어릴 때는 체력적으로 정말 너무 힘들더라. 그래도 그때가 좋은 때야. 걱정할 게 없잖아. 애들 커봐. 정신적으로 정말 너무 스트레스야. 우리 애들도 엄청 순하고 착실하게 잘했던 애들인데 사춘기가 무섭네. 아이 어릴 때 많이 누려, 평생 효도 3살까지 다 한다잖아. 그때가 제일 예쁘고 좋을 때야."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말에 담긴 진실을


아이가 크면 클수록 육아는 점점 더 어렵다.

선배님의 말씀이 진실이었다.


순하디 순했던 첫째도 10살이 되고 자기주장이 세지고, 또래 문화를 접하면서 엄마 아빠와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이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녀석이 저러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때도 있었다.

지금은 잠잠해져서 다시 평온해졌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크는 과정이라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힘들고 어렵기는 하다.


누구나 그렇듯 누구에게나 육아는 어렵다.

육아가 힘든 건 당연하다.

모두 엄마 노릇은 처음이니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이와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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