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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Feb 07. 2021

거짓 신을 폭로하는 복음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옮김, 『신국론 1 (1~10)』, 분도출판사, 2004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기독교를 비난하는 이교도를 논박하고 기독교의 복음을 변증하는 1~10권과,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을 중심으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세계의 역사를 해석하는 11~22권으로 나눌 수 있다.      


분도출판사에서 성염 역주로 출간한 『신국론』은 라틴어 대역본이라 3권 분량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제1권이 바로 이교도 논박과 기독교 변증을 다루고 있는 1~10권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부터 ‘두 도성’에 대한 신학적 착상을 가졌지만, 본격적으로 저술을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410년 고트족의 로마 침공이다. 로마 곳곳에 파괴와 방화가 행해지고, 사람들은 로마를 피해 피난을 떠났다. 이때 로마의 전통 다신교 신앙을 지니던 이들은 로마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기독교의 신을 섬겼기 때문이라며, 재난의 원인을 기독교에 돌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쇠락하고 로마에 재난이 닥쳤다’는 공박에 대해 응답하고 기독교의 복음을 옹호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신국론』 1~10권은 두 가지 논지로 글이 전개된다.      


하나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로마의 역사는 여러 재난과 재앙을 겪었고 로마의 번영은 로마의 다신교 신앙과 무관하며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졌다는 ‘로마사의 비판적 회고’이다. 다른 하나는, 로마의 신들은 전혀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그들이 로마인의 윤리나 도덕을 퇴폐시켰고, 이를 변화시킨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사실 1~10권은 시사적인 부분으로, 『신국론』의 ‘두 도성 이론’의 논지와는 큰 관련성은 찾기 힘들다. 그리고 현대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로마의 신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다신교 신앙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4권과 7권은 매우 지난하여, 의무감이 없으면 끝까지 집중해서 읽기 매우 힘들다.      


다신교 신앙 비판을 읽기 힘든 결정적인 이유는 현대에 적실성이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테르라(대지의 신), 텔루스(경작지의 신), 텔루모(토지의 신), 베스타(화덕의 여신) 같은 생소한 신들의 이름은 현대와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다신교적 환경에 노출된 적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업이 현대에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의 신과 신앙을 공박했던 것을 우상숭배의 의미로 이해하면, 그의 작업은 현재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생각한다. 다신교는 현대에 별다른 힘이 없더라도, 우상은 여전하다. 아니, 대놓고 신앙과 숭배의 외형을 갖추지 않아 더욱 은밀한 모습으로 우상 숭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팀 켈러는 『내가 만든 신』(두란노)에서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우상으로, 평생소원, 사랑(연애), 돈, 성취, 권력, 문화와 종교를 들고 있다. 이러한 우상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순간, 내 영혼을 옥죄고 지배하는 ‘거짓 신’이 된다.     


“어리석은 무리는
하느님의 선물들을 자신들의 신으로 만들어 섬기면서도
정작 그 행복이라는 선물을 베푸시는 분께는
완고하고 오만한 의지로 상심을 끼친다.”(신국론, 4.30)

이것이 우상의 본질이다. 거짓 신들은 나에게 행복과 인생의 의미를 줄 것처럼 약속하지만, 실상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 공허함만을 줄 뿐이다.      


팀 켈러가 든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다. 야곱이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던 시기, 그는 라헬에 한눈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7년간 라반의 밑에서 일한다. 그러나 라반은 약속과 다르게 라헬 대신 레아를 그와 결혼하게 했는데, 이를 창세기를 이렇게 기록한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창 29:25)” 야곱은 아름답고 매력 있는 여성 라헬과의 결혼이 자신의 인생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의미있게 만들어주리라 생각했지만, 눈을 떠보니 레아였다.     


이 장면은 아담 이후로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실망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무엇이 나의 삶을 더 좋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것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갈증과 같은 것이었다.      


하와는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과적으로 필멸의 존재가 되었을 뿐이었다. 야곱은 라헬이 자신의 도망자 인생을 더 나은 인생으로 바꿔주리라 기대했지만, 실상은 레아였다. 마찬가지로 레아는 야곱의 아이를 낳음으로써 남편의 사랑을 갈구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넷째 유다를 낳고, 그녀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 29:35)”는 고백을 하며, 하나님이 진정한 자신의 행복임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그녀의 출산이 멈추었다.” (창세기, 같은 부분)     


이를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거짓 신과 하나님 숭배의 문제를 행복의 문제와 연결지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여신의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인간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주는 신이야말로 하나님이라는 그의 독특한 신관은 되새겨 볼 만하다.     


로마인들은 현세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내세의 지복을 위하여 로마의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그 능력이 심히 의심스럽고, 그 체계가 너무나 비합리적이며, 로마인의 도덕성을 마비시키는 신들이 진정으로 참된 행복을 약속하는 신일 수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설한다. 오히려 그 신들은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인간을 기만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제6권에서 전개되는 로마의 신학 체계 비판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 신학에는 설화신학-자연신학-민간신학 등 이렇게 3종류가 있다. 그런데 설화신학은 온갖 비윤리적 악행으로 가득한 신의 행적을 기록하며, 민간신학 혹은 도회 신학은 그런 신들의 악행을 극장에서 공연하며 신들의 비위를 맞춘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설화신학이란 것은 신들에 관해 추잡한 짓들을 꾸며내서 퍼뜨리며, 민간신학은 그런 짓을 부추기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만약 신들이 정말 그런 악행을 한다면, 로마의 종교는 믿을 것이 못 된다. 반대로 신들이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 로마의 종교는 매우 사악한 방식으로 신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느 면으로 보든,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도논법에 따르면 로마의 종교와 신들은 거짓이며,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로마의 도회 신학은 “다양한 신들의 활동영역을 보장하고 적절하게 신들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국가적 조화를 꿈꾸는 신학이다(김회권, <하나님 도성, 그 빛과 그림자>, 비아토르).” 이러한 로마의 국가주의적 종교는 신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국가의 권위와 번영을 누린다. 그리고 국가에 속하면, “국민들을 구원해준다는” 집단구원의 믿음을 선사하여, 최종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국가에 복종시킨다. 도회 신학의 본질은 집단구원이다. 진선미의 실체인 천황을 정점으로 두는 제국 일본의 국가 신도, 옴진리교, 대형 교회에 속했을 때 느끼는 안정감 등. 현대에도 집단구원의 환상은 계속된다.      


복음은 바로 그런 거짓 신들로부터 사람들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며, 집단구원 속에서 감추어진 개인을 발견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깊고 깊은 겸손을 통해,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진리를 위해 죽고 진리와 더불어 살아있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
저 미신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로마의 신들도, 현대의 수많은 우상도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약속하지만, 그들은 인간을 지배하고 진정한 행복에 다가갈 수 없게 한다. 사실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거짓 신들의 예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참 자유와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충만한 행복은 아무도 예속시키지 않는 그런 삶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허구로가 아니고 진리로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께 참여함으로써 행복하다.”

1~10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 한 마디 안에 요약된다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1~10권은 현대 한국인에게는 확실히 매우 읽기 힘들다. 그렇지만, 치밀하게 다신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증명하여 기독교를 변증하는 대목을 읽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웅장함과 웅혼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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