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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Feb 07. 2021

우연이기에 더욱 슬픈 이야기

조위한의 <최척전> 읽기

조위한, 박희병, 정길수 옮김, 「최척전」,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돌베개, 2008


<전란의 소용돌이>는 '최척전', '김영철전', '강로전', '정생기우기' 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문학을 수록하였다. 한국 고전 문학을 전문으로 연구한 분의 신뢰할만한 번역본으로 이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프랑스 문화사 연구자 로버트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 제1장 '농부들은 이야기한다'에서 설화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곧, 설화란 자체적으로 기록을 남길 수 없던 일반인들이 남긴 사료라는 것이다. 빨간 망토, 푸른 수염, 헨젤과 그레텔 같은 이야기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마다 조금씩 버전이 다르고, 시대마다 또 내용이 달라진다. 단턴은 이를 통해 당대 사람들의 의식 구조와 설화 속에 담긴 일반 민중들의 욕구를 추적한다. 설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다.      


나는 한국의 고전 소설이 서양에서 설화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란기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줄 수 있는 전쟁 문학을 수록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를 읽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집중하고픈 작품은 첫 번째 수록작인 <최척전>이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겠다. 최척과 옥영은 부부였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옥영은 일본 상인에 의해 끌려가고, 최척은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아내가 끌려간 것을 알고 명나라 장수를 따라 상인이 된다. 그러다 둘은 베트남에서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다. 하지만 최척은 다시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전쟁 중에 죽은 줄 알았던 첫째 아들 몽석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둘은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본가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고, 중국에 남아있던 옥영도 아들 내외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중간에 해적을 만나 위험에 처했지만, 조선인 배의 도움으로 무사히 조선까지 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온 가족이 몇 십 년만에 하나로 다시 뭉치게 되었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척전>은 중요한 장면은 모두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쟁 중 생이별을 겪었던 옥영과 최척이 상인이 되어 베트남에서 만나게 된 것도, 몽석과 최척이 다시 만나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 것, 옥영이 배를 타고 조선으로 오다가 조선인 배를 만난 것도, 모두 우연의 연속이다.     


길지도 않은 이야기에 이렇게 우연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 것은 한국 고전 소설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척전>의 경우, 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이야기는 우연이 아니면 성립될 수가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최척전>은 1621년에 조위한 지은 것으로 나온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20년이 지난 뒤였다. <최척전>은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였던 것이고, 그만큼 이 작품의 이야기는 호소력을 지녔을 것이다.     


박양자 수녀의 <일본 키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순교의맥) 같은 책을 읽으면,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납치되어 노예가 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이 가톨릭을 많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승려 케이넨의 기록에서도, 조선인 노예 매매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옥영처럼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이 많았고, 그만큼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채 살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베트남, 일본, 류큐를 종횡무진하는 공간적 배경도 당대 사람들에게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이 소설을 읽었거나, 귀로 들었을 사람들에게 <최척전>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 혹은 자신들 주변 사람의 이야기였을 수 있다.     


최척과 옥영 가족의 헤어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지만, 재회는 지극히 우연적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래서 더욱 이 이야기는 비극적이다. 운이라도 없었으면 이들 가족은 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최척전>의 결말과 달리, 당대 많은 가족이 전쟁 중에 헤어져 영영 생이별하게 되었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척전>의 비현실적일 정도로 우연에 의존하는 전개와 결말은, 역사적 진실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나마 헤어진 가족들과 다시 만나고픈 간절한 심정 말이다.     


“그 뒤로 최척과 옥영은 위로 부모님을 봉양하고 아래로 아들과 며느리를 거느리며 남원 서문 밖의 옛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이 <최척전>의 결말은 당시 조선에서 생각하던 ‘이상적인 가족의 회복’을 묘사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에서 당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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