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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Mar 25. 2021

순진한 텍스트 내재적 독해의 위험성

리처드 월린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2021


한 텍스트를 읽을 때, 외재적 관점과 내재적 관점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재적 독해란 텍스트 내용만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고, 외재적 독해는 텍스트 내용에 더해 작가의 생애나 사상, 그 텍스트가 생산된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나 역사적 상황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던, 책을 읽던, 필요한 것은 꼼꼼한 텍스트 분석과 작품을 읽을 때 필요한 배경지식이다. 특히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그 텍스트가 나온 시대의 상황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원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이나 분석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철학 서적을 읽더라도 역사 공부가 필요하며, 고전 작품을 읽을 때는 먼저 해제를 꼼꼼히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외재적 독해와 내재적 독해가 설득력 있게 조화되면, 철학사나 사상사를 넘어 본격적인 지성사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리처드 월린의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는 하이데거에게 가장 예민하고 첨예한 논쟁거리인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 전력’과 ‘타락’한 스승의 철학과 대결하면서도 스승의 거대한 그림자에 서 있던 제자들(한나 아렌트, 카를 뢰비트, 한스 요나스, 마르쿠제)의 철학을 다룬다. 저자는 기존의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이데거의 철학이 가지는 “역사-정치적 심층 차원”을 간과한 채 “순수한 텍스트 내재적 독해”만을 수행해 나치즘과 하이데거 사상이 가지는 친밀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저자의 결론은 하이데거가 나치즘을 옹호한 것은 결코 순간적인 실수나 덜컹거림이 아니라 『존재와 시간』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철학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이다. 나치즘과 하이데거 사이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하여 저자는 본서 2장에서 하이데거와 그의 제자들이 살아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의 반유대주의와 니힐리즘, 그리고 근대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지적 풍토를 밝힌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흐름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맥락에서 그는 나치즘을 니힐리즘에서 유럽을 구원할 초인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3~6장은 한나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여 지성사적 맥락에서 그들의 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안에서 하이데거의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이들의 한계를 되짚는다. 7장은 하이데거의 정치철학을 평가하며, 8장은 『존재와 시간』의 주요 개념과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다룬다. 여기서도 하이데거의 반(反)근대주의적 사유를 볼 수 있다.     



아마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장 궁금증을 유발하는 인물은 한나 아렌트일 것이다. 중요한 철학자의 전집 번역은 거의 없는 한국에서 한나 아렌트는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될 정도로 그녀의 정치철학은 매우 높은 위상을 차지하며 귀중한 통찰을 준다. 특히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사용한 “악의 평범성” 개념은 홀로코스트 이후 악의 문제와 정치적 책임 문제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여러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그녀의 생애와 하이데거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구성하며, 그녀의 시각 안에 내포된 한계를 지적한다.     


아렌트는 유대인이었지만, 자신의 유대성을 부끄러워했으며, 빈민가의 유대인 거주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자신을 좀 더 세련되고 숭고한 정신의 전통, 즉 유럽의 지적 전통과 동일시했다.” 그녀는 자신을 ‘동화’된 독일인으로 여겼지, 동화되지 않은 유대인들과는 선을 그었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무신경하게 “피해자와 집행자를” 동일시하는 기술에서도 볼 수 있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죄의 근원을 근대성에서 찾는 그녀의 사유이다. 아렌트는 나치가 저지른 범죄는 “특정하게 독일이 저지른 범죄라기보다, 정치적 근대성 일반이 갖는 문제의 징후”였다고 기술한다. 그녀에게 홀로코스트 같은 문제는 근대 사회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히만에게서 “잘못된 행위가 규범이 되어버린 거대 관료기계”로부터 파생되는 평범성과 무사유성을 보았던 것이다. “관료주의적 전문화와 노동 분업이라는 근대의 원칙”은 홀로코스트의 집행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그녀가 꺼내든 개념은 하이데거의 비본래성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주의적 해석은 당연하게도 특정한 집단학살이 가지는 특수성을 포착해내지 못하며 나치의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한나 아렌트의 근대성 비판과 나치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은 하이데거와의 관련성 속에서만 온전히 해명될 수 있다.     



스승의 철학과 거리를 두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던 아렌트의 한계는 다른 제자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 책에서 다룬 4명의 제자들은 모두 공통으로 하이데거처럼 근대성, 근대주의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느꼈으며, “근대를 ‘죄악’시”하는 보수주의적 관점을 공유하였다. 그들은 “정치적 근대성, 즉 민주주의, 자유주의, 개인의 권리 기타 등등의 본성에 관한 일련의 뿌리 깊은 편견을 받아들였다.”      


물론 저자의 하이데거 독법에 비판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소위 ‘우리 시대의 사상가’라는 슬라보예 지젝은 “월린을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비평가들이 자칫 하이데거가 근대성의 기본 교의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지젝은 하이데거의 근대성 비판을 매우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그는 하이데거가 ‘유대성’을 언급한 것은 인종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 “근대 기술 문명에서 절정에 달한 제작성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장난이다. 역자도 지적했듯이 “왜 다른 민족이 아닌 유대인이 서구 형이상학적 사유, 곧 제작성의 사유와 태도를 대표하는가?” 유대성이라는 누가 봐도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단어를 쓰면서, 이 단어는 전혀 민족적이지 않고 인종적이지도 않다고 해명하는 것은, 조잡한 언어적 환원주의이고, 기만이다. 근대성 비판과 극복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가져온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도, 이를 탈실재화하고 탈맥락화하는 것이 진정 근대성 비판인지 되묻고 싶다.     


책이 꽤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철학책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면, 적어도 ‘현존재(Dasein)’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책을 읽는 데 크게 어려운 점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을 다룬 부분은 꽤 재밌다. 서문이 제1판과 제2판 두 개가 있는데, 옮긴이의 말과 제1판 서문을 읽고 본문을 읽은 뒤 제2판 서문을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제2판은 레오 스트라우스, 레비나스 같은 이들과 하이데거 사상과의 연관성을 밝히는데, 이 부분은 넘겨도 무방할 듯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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