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희 작가의 브런치북 <나의 레슬리> 를 읽었다
살다 보면 굳이 깨우지 않아도 기어이 저 홀로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있다. 뫼비우스의 띠를 한 바퀴 돌아온 것처럼, 이제는 떠올릴 시간이 됐다는 듯이. 혹은 그 자리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기라도 했던 양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기억.
4월 1일은 누군가에게는 만우절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배우 장국영의 기일'이다. 한창 만우절 장난을 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재밌던 시절이 지나버린 내게는 꽤 오래전부터 후자에 가까웠던 날짜이고. 만인의 사랑을 받던 장국영의 작품은 나이 어렸던 나조차도 '패왕별희',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등 출연작 몇 편은 바로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고, 인상깊게 보고 친구들에게 몇 번이고 설명했던 씬들도 있었다. 그런 그가 다른 날도 아니고 만우절 날 생을 마감한 것은 충격적이고 슬픈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말, 가을이 한창 무르익던 어느 때에 다음 주기를 기다리며 차근차근 제 궤도를 돌고 있던 기억을 다소 이르게 건드린 것이 장지희 작가의 브런치북 <나의 레슬리> 였다.
당시 자주 접속하던 SNS에 공유된 이 작품은 타임라인을 슥슥 올리다가도 눈을 사로잡을 키워드와 사진을 갖추고 있었다. 레슬리. Leslie Cheong. 많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으로는 '장국영'. 그에 대한 것이 틀림없는 <나의 레슬리>. 덕후 마음은 덕후가 가장 잘 안다고, 제목만으로도 한 자 한 자 마음을 힘주어 눌러썼을 거란 기대감이 들었다. 이미 독자 여럿 울린 후였던 작품을 나는 오른손으로는 심장 부근을 꾸욱 누른 채 조심스럽게 표지부터 스크롤을 내렸다.
<나의 레슬리>는 작가가 30년 넘게 팬이었던 대상 장국영에 대한 추억을 적어나간 작품이다.
장국영이 80-90년대 홍콩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가수,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만큼 한국의 대중문화 시장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조명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내한 때마다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렸는지, 그들이 얼마나 열렬했는지는 장지희 작가도 작품 속 관련 일화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장국영에 대한 생각과 그간 자신의 삶이 장국영이라는 존재, 그의 영화, 노래와 어떤 식으로 조우했었는지를 가장 개인적인 시선과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럼에도 계속 궁금하고 읽어나가고 싶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장국영의 활동을 응원하고 그의 무대에 환호하고 용기 내어 접점을 만들어가는 모든 일화들은 애정에 기반하고, 순수한 열정의 형태로 펼쳐진다. 같은 대상이라도, 같은 사건이라도 기억은 개개인의 감정 프리즘을 통해 가장 특별하고 아름다운 빛깔로 번진다.
장국영은 2003년 4월 1일,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생을 마쳤다. 하필 '만우절'이었고 한창 장난기 심할 나이였던 나도 친구들의 시답잖은 장난에 들떠있던 날이었다. 그리하여 비보는 그 자체로 역설처럼 느껴졌고, 큰 충격과 지독한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는 그날에 대한 복기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후의 '장국영'과의 시간이 어떠했는지를 꽤 담담하게 적어 나갔다.
하지만 예전만큼 뜨겁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의 팬이었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조금씩 멀어지긴 했지만 그 대신에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는 장국영을 지켜보는 새로운 기쁨도 알게 되었다.
지금도 한국에서 ‘장국영 머리’라 불리는 후까시를 잔뜩 넣은 헤어스타일을 유행시켰던 그 머리카락의 숱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도 지켜보았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해지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장국영이 숀 코넬리처럼 하얀 머리의 노신사가 되는 날까지의 과정을 함께 하고 싶었다.
— 06화 '風再起時(풍재기시) - 만약, 장국영이 살아있다면' 中
1화부터 14화까지 찬찬히 읽어나가는 내내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아닌 누군가를 이토록 깊이 마음에 담고 오래도록 아껴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내게 물었다. 내가 이런 무게의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는지. 언젠가는 잠시나마 가져볼 수 있을지.
그간 홍콩은 도합 세 번을 방문했다. 장국영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을 지날 때면 매번 고개를 한껏 젖히고 올려다봤다. 외벽을 전부 황홀할 정도로 눈부신 금색으로 칠한 그 고층 건물을 말이다. 씨티의 숨 막힐 듯한 마천루에 비하면 그리 큰 키는 아니어도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수밖에 없을만치 아름다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은 그 자체로 황금 갑옷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
안 그래도 뜨거운 햇빛과 모든 것을 반사해버리는 건물 때문에 눈썹께에 손 차양을 만들어 얹고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자면 왠지 어딘가에 그가 서 있을 것 같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가 그날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지금까지 아주 짓궂은 만우절 장난을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정말로 아주 어쩌면.
얼마의 시간이 흐르든 만우절이 그러하듯 홍콩 또한 내 기억 속의 장국영과 <나의 레슬리>를 건져 올리는 매개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배우 장국영을 사랑한 많은 이들 또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이번에 브런치북 <나의 레슬리>를 다시금 읽어가며 작가님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의 순간순간이 겹쳐 보였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대상을 좋아하고 열렬히 몰입하다 보면 삶에도 물이 드는 것 같다. 내가 사랑한 것이 어느 순간 나의 일부가 되고 삶의 항로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좋아하는 것이 취미 이상의 일이 되기도 하고 좋아하는 과정에서 얻은 생각과 감각이 나를 키우는 양분이 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실상 나와는 그 마음 하나 빼고는 너무나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가족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이가 된 일도 여럿 있다. 돌아보면 환경과 시간을 뛰어넘는 많은 관계가 그런 식으로 흘러왔고 말이다.
타인의 애정을 들여다보고 공감한 시간, 지금은 대상 없는 내 애정과 그간의 삶에 남겨진 흔적도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기분이다.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쏟아본 적 있는 당신에게
브런치북 <나의 레슬리>를
추천합니다.
브런치북 <나의 레슬리> 이후 장지희 작가는 매거진 <당신의 레슬리>로 다시금 기억을 확장하고 있다.
<나의 레슬리>에 잠시라도 가슴이 저릿했다면 다음은 <당신의 레슬리>를 구독해보는 건 어떨까.
참! 이건 정말 사족이지만. 언제 읽어도 내 심장까지 쾅-하고 떨어지는 대목은 바로 여기.
그리고 나는 척 하고 내 손을 내밀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레슬리는 씩 웃으며 내 손을 맞잡고는 물어왔다.
“하이, 반가워 모니카. 그런데 너 내 팬이구나?”
— 09화 '1999년 네 번째 만남 - 장국영과의 눈 인사' 中
직접 겪어보지 않았어도, 덕질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상만으로 내적 비명을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딱 그런 순간이다. 너무너무 짜릿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