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결투>, 내 마음대로 톺아보는 시간
뮤지컬 <결투> 시놉시스 외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 다수 포함
한창 뮤지컬 <결투>에 푹 빠져 있는 시기다.
창작 초연 작품으로 창작진이 그간 보여줬던 작품들을 떠올리자면 "오늘 이곳에 협이 무엇인지 보여주리라"라는 카피가 와닿지 않았는데, 개막하고 보니 중국 판타지 무협의 주요 콘셉트・문법을 일부 차용하여 강호에서 얽히고설킨 과거와 은원의 실타래로 모든 인물을 끈끈하게 묶어내면서 협俠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화려한 액션에 창작진 특유의 위트, 그걸 살리는 배우들의 감초 같은 멀티 연기까지 더해지니 재미를 못 느끼려야 못 느낄 수가 없다.
동일한 작품을 한 시즌에 수차례 보다 보면 이전에 놓치거나 무심코 흘렸던 텍스트, 설정을 되새기거나 배우들이 새롭게 보여주는 것들에 대해 과도하게 해석하고 집착하고 몰입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작품에 등장하는 계절 표현에 먼저 꽂히고 말았다.
시작은 16번 넘버 '일심문 무공'이었다. 사계절의 자연 현상과 순환의 단초를 무공으로 설명하면서 가장 직설적인 표현들이 등장하는 구간이다.
춘빙낙화 일심보법 春氷落花一心步法
하우회풍 일심권법 夏雨廻風一心拳法
추야비조 일심장법 秋夜飛鳥一心掌法
동천삭풍 일심검법 冬天朔風一心剑法
이쯤 되면 어릴 적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대한 기억이 강렬한 사람은 여전히 관련 세계관에 취해 있는 터라 이 무협 뮤지컬을 보고도 비슷한 공식을 대입해 보고 싶어 한다. 창작진의 의도야 어떻든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내가 더 재밌다는데'의 자세로.
관련 힌트가 작품 곳곳에 산재해 있다 보니 어디부터 시작할까 고민하다 프로필 사진 속에 등장한 취선의 '백매白梅'와 맹도의 '대나무', 그리고 비룡의 '버드나무'로 시작하여 각각 봄, 겨울, 여름으로 방위를 잡았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별 묘사와 상황을 바탕으로 마저 배치하여 사계절, 사방위, 사신, 사군자의 속성으로 극 중 인물의 배경, 성격, 처한 상황 등을 대입했다.
봄, 매화
청룡 靑龍
동쪽을 수호. 생명의 탄생과 바람을 다스림
나무 木
푸른색
7년 전 여름, 무공을 폐한 뒤 산골에서 술에 빠져 지내는 은둔 고수로 다른 어느 인물보다 자연과 가깝다. 처서 주위에는 노송老松이 여러 그루 있다.
공연 초반부에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한 황자 '천천'을 제자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후회 없이 지킬 것임을 '맹도'에게 약속하는 모습도 보인다. '천천'과 '비룡'에게—아닌 척 해도—다정하고 온화하고 자상한 모습을 보이고, 죽을 때까지도 제자들을 걱정하며 따뜻한 당부의 말을 남긴다.
맹도와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선 노랗고 붉은 기가 도는 밝은 조명이 주로 사용되고, 제자들에게 수련을 시키는 장면의 시간적 배경으로는 아침 해가 밝아오는 때로 묘사된다.
검푸른 색의 복장에 푸른기가 도는 연회색 조끼를 걸쳤으며 항상 부채를 지니며, 간단한 주술은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면서 걸며 술법 외에도 보법(춘빙낙화 일심보법)에 능하다.
여름, 버드나무*
주작 朱雀
남쪽을 수호. 불을 다스리고 강인한 생명력, 회복, 치유의 능력을 갖춤. 죄의 심판자
불 火
붉은색
5세의 나이에 부모를 잃고, 거둬서 기르고 보호해 준 사형들 '풍운쌍검'도 몇 해 뒤에 잃었다. 그럼에도 무너지거나 멈추지 않고 강호에서 살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며 사형들의 복수를 갚으려 한다.
운검 "지는 해가 왜 이리 뜨거울까."
풍검 "그러게. 강호의 노을은 핏빛이구나."
풍운쌍검이 비룡을 처음 마주치던 날의 배경은 석양에 붉게 물든 노을 풍경이다. 그리고 피치 못하게 이별을 결심해야 하는 순간에 풍검은 비룡에게 "남쪽으로 열흘 동안 걸어갔다 돌아와라." 라며 헤어짐을 고한다.
성정이 불 같은 데가 있고 의지가 강해 상대적으로 모범생 스타일에다 온화한 성정의 '천천'을 기존과 다르게 움직이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붉은색 계열의 의복을 착용하지만 부드러운 토양을 떠올리게 하는 쪽이며, 대마두의 채도 높은 빨간색 옷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 사군자 중 여름을 대표하는 건 '난초'지만 비룡의 프로필에선 버드나무가 보인다. 이별의 상징이자 꽃말은 '솔직함'이라는 게 비룡의 삶과 성격을 담고 있으니 이 정도는 "앞으로 협객들의 식물은 매류柳국죽이라고 하죠" 하고 모른 척 넘어가 본다.
가을, 국화
백호 白虎
서쪽을 수호. 비, 바람, 구름을 자유롭게 운용. 죽음을 관장하며 이승과 저승을 잇고, 인간을 수호
쇠 金
흰색
강호일도江湖一檢라 불리는 '맹도'와 겨룰 수 있을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가졌다. 각각 바람風과 구름雲에 '쌍검'이라 불리는 조합인 만큼 실과 바늘 같아서 언제나 함께 하며,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살아갈 의미를 잃는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하겠으나—한 몸 같은 관계다.
귀뚜라미 우는 가을, 서쪽 하늘에서 지는 석양을 등진 순간 비룡을 만났다. 빠르게 어둠이 내리던 그 밤, 부모는 물론 맡아줄 친척도 없이 혼자 언제 어떤 위험에 빠질지 모를 어린아이를 보호하고 가족이 되어줬다.
둘이 지닌 검의 주 색은 흰색이고, 특히 운검은 복색과 멱리 또한 흰색이며 옷깃과 칼집에 국화 꽃잎 모양으로 보이는 자수가 놓아져 있다.
겨울, 대나무
현무 玄武
북쪽을 수호. 강한 음기로 북방의 귀신을 막고 전투에 능함
물 水
검은색
검법(동천삭풍 일심검법)으로는 따를 자가 없고, 강호와 황실을 모두 장악한 대마두를 누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춘 자타공인 강호 최고의 실력자다.
황궁 지하의 무저갱을 설계했고, 북쪽 출구에는 따로 경비병을 세울 필요가 없을 정도의 강한 환계를 걸었다. 대마두에 의해 운신만 간신히 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그 척박한 환경에서 3년을 버티며 천천과 비룡에게 길을 안내한다.
복색은 '취선'과 마찬가지로 검푸른색에** 가슴팍과 옷자락 끝에는 대나무를 수놓았고, 허리에는 검은 혁대를 맸다.
** 일심문의 문파 색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취선의 푸른색과 맹도의 검은색이 공존하며 이별 후에도 과거에 엉킨 사제-사형의 존재를 놓지 못하는 것으로 봐도 재밌다.
황룡 黃龍
중앙을 수호. 조화와 균형
흙 土
노란색, 금색
'천천'은 용포 가슴팍에 크게 수놓은 황룡을 차치하더라도 타고나길 용의 낙인을 갖고 태어난 황자다. 화려한 용포를 벗고 기억을 잃은 뒤에는 권위에서 멀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정의롭고 선한 모습이 더 도드라지고 불필요한 유혈 사태나 폐를 끼치는 일은 피하고 싶어 하며 비룡을 말리는 역할도 한다.
'점소이(도나라 백성)'에게 이름을 묻는 것 또한 천천이라는 점에서 강호인으로서의 은원을 풀려는 자세 외에도 도나라 백성에 대한 황자로서의 책임과 사명감도 보인다.
노란 의복을 입은 점소이의 경우 그가 대를 이어 운영하는 주점 '용마주루'는 귀천과 선악, 배경과 무관하게 누구든 오갈 수 있는 곳이며, 그 자체로도 이야기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경계를 흐리는 존재다. 천천의 지지자이자 비룡과는 선대의 우연으로 엮인 필연의 협력 관계이기도 하다.
인물 개개인의 성격이나 상황적 속성 외에도 천천과 비룡, 두 소년 협객들을 따라가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조금 더 끈끈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신법 기초도 모르던 '천천', 그리고 풍운쌍검 품에서 자라 기본적인 건 이미 꿰고 있던 '비룡'을 데리고 기초 수련부터 시작해서 고급 기술까지 터득 시켰으나 취선은 일심문 무공의 완성엔 비급祕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냥 내주지는 않을 터, 사부님은 비급을 세 조각으로 나눠 각 시험을 통과했을 때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
1. 저 노송 위에 올라가서 첫 번째 조각을 가져와라
그 어떤 도구도 쓰지 않고, 맨몸으로 경공을 써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야 한다.
무공을 완성해 세상으로 나가기 전 무엇보다도 먼저 사부인 취선 자신(나무)을 올라서라는 의미로 들린다.
2. 저 계곡 아래 내려가서 두 번째 조각을 가져와라
계곡 밑으로 내려가 시각을 미혹하는 환계를 극복한다.
극 말미에 황궁 지하 무저갱에서 북쪽 출구의 환계를 통과한 걸 생각하면 맹도의 영역(물)으로 들어가 그를 뛰어넘는 연습의 과정처럼 느껴진다.
3. 저 동굴 속에 들어가서 마지막 조각을 가져와라
백독불침 호신강기百毒不針護身罡氣 를 익힌 뒤에야만 동굴 속에 쏟아지는 맹독성 암기暗器를 피할 수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에 이어 이제는 취선 자신도, 맹도도 아닌 일심문 외부 세상의 어둠과 시련 속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지막 가르침으로 들리는 부분이다.
취선은 천천과 처음 만났을 때 7년 전 여름날 무공을 폐하였다고 밝힌다. 요즘 들어 부쩍, 일심문 무공 중 '하우회풍 일심권법'에 맹도의 환영이 등장하는 걸 보면 어쩌면 사제가 그의 곁을 떠난 것도 여름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생각에 골몰하다 보면 '여름'이 선대의 계절이 지난 뒤, 후대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시기를 그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게는 <M16. 일심문 무공>에서 각 계절적 속성을 고스란히 담은 보법-권법-장법-검법을 훈련하고, 두 소년 협객이 취선을 떠나보낸 뒤 그의 유언을 따라 맹도를 찾아가기까지의 긴 여정과 고난이 계절감으로 연출된다. 따뜻한 계절의 아침 참새들 우는 소리, 무더운 여름날 매미 우는 소리, 가을밤 귀뚜라미 우는 소리, 그리고 혹한의 북풍이 몰아치는 소리와 조명 색으로 말이다.
크게 보면 <결투>는 천천이 대마두의 혈겁을 피해 맹도(겨울)와 함께 취선(봄)에게 향하고, 비룡(여름)을 만난 뒤, 비룡의 시점에서 풍운쌍검(가을)과 얽힌 과거를 거쳐, 다시 두 소년 협객이 대마두와 맹도(겨울)를 다시 만나는 흐름으로 전개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갑자기 뭔가 정말정말 엄청나게 거대하고 웅장한 스케일의 스토리로 느껴지고 심장이 묵직해진다...!)
가까운 지인들은 "오늘 뭐 봐요?"라고 묻고, 조금 더 가까운 지인들은 "오늘도 도나라 가?"라고 묻는 시절이다. 누군가는 "오늘은 <결투> 안 봐?"라고 묻기도 한다.
러닝타임이 110분으로 그리 짧지도 않은데 첫 관람 회차부터 '이렇게 재밌다고?' 하면서 나왔고 매번 지루하거나 질릴 틈 없이 보고 있는 게 신기하다. 게다가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데 주위에도 비슷한 상태로 보고 있는 동료 관객들이 적잖게 있어서.
참 이상하고도 즐거운 때다. 즐거움이 과해서 이 기이한 흥분 상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면 누군가는 또 "이럴 때 복 받은 줄 알고 즐겨."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오늘도, 또 봐요. 오늘도.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