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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문 Sep 20. 2022

가을의 초입 기록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좋아할 것



이틀에 걸쳐 속한 조직들에 모두 인사를 마쳤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동하는 쪽과는 이야기 나눈 지 한참 된 터라 "저 가는 거 맞죠? 저 반품하시는 거 아니죠?" 하고 재차 묻게 되는 것이다. 절대 못 도망간다는 답변을 받고서도 기분이 싱숭생숭한 건 며칠 후에 정말 발령 공지가 떠야 조금 사그라들 것 같다.

연휴 직전에 메이에게 연락이 왔었다. 누군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그게 나냐고. 이동 예정일까지 꽤 시간이 남은 때이기도 하고, 괜시리 짓궂은 장난기가 올라와서 모르는 척을 했는데 정작 주요 협업 조직 중 한 곳에는 노아가 구체적으로 공지를 끝냈다길래 조금 머쓱해졌지만 아마 메이는 여전히 모르고 있을 것 같아. 이번 금요일에 티타임에서 만나면 메이가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반응할 지 눈에 선하게 보이는 거 같다. 벌써 반갑고 좋네.


'돌아간다'라는 감각을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좋은 대화 끝에 재회를 기약하며 시원하게 응원해준 지금 조직에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지난 주말에는 그간 미뤄둔 뉴스레터를 싹싹 모아 읽었다. 관극 예정이 있긴 했지만 한창 열심히 보던 뮤지컬 폐막 후 상실감에 젖어 예정 티켓을 죄다 정리한 끝에 생긴 여유였다.


개중에 '주간 배짱이' 10월의 작가, 정지우님의 <편식하는 사람들이여, 단결하라> 라는 에세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오이에 대한 호불호 이야기로 시작하여 '사람이 좋아하는 것만 취하며 살아도 괜찮더라, 좋아하는 것과 소중한 것에 집중하기에도 인생은 짧다' 는 메시지를 담고 있던 게 때때로 생각난다.


먹고 싶은 것 먹고, 듣고 싶은 노래 듣고, 읽고 싶은 것 읽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살아도 인생은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취향들이 지나치게 편중된다면, 그 나름의 문제랄 것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콜라 좋다고 매일 콜라만 마시면 당뇨에 걸릴 수 있다. 음악이나 책도 특정 부류만 계속 소비하면 협소한 세계에 갇힐 수 있다. 사람도 너무 좁게만 사귀면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인맥을 형성하는 데 지장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적당한 다양성에 자신을 열어갈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절반쯤 되는 음식을 먹는다면, 나머지 절반쯤은 싫어해도 좋다. 무엇이든 그럴 것이다. 나의 가족이나 친구 등 내 곁의 사람이 좋아하는 것의 절반쯤을 내가 싫어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집단주의 문화를 만들어왔다. 앞으로는 그보다 더 자유롭고 서로의 취향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 주간 배짱이. (2022). 128. 사수 말고 '돌보기'가 있는 회사


몇 년 전까진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니까, 차선으로 싫은 것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었다. 싫은 이유를 알아내고 그것들을 내 삶에서 멀리 하고 지워버리면 내 자신이 조금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지금도 그게 아주 유효하지 않은 방법은 아니라고 여전히 생각하긴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나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싫은 것을 싫어하는 감정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에너지를 썼던 건 아닌가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시기를 거치고 저어어엉말 명확하게 싫은 것들이 조금씩 썰려 나가고 나니까 이제는 좋아하는 것에 귀 기울이고 마음 쓸 여유가 생겼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내키지 않는 것들에 대해 내 감정을 부끄럽거나 민망해하는 것도 줄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즐겁고, 그것들이 내게 일으키는 긍정이 좋다.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하니 '나는 OO 좋아해' 라는 말을 할 때도 확신이 생기고, 왜 좋아하는지 설명하는 것도 재밌다. 취미나 취향이 같지 않아도, 결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곁을 나누게 된 것도 그 결과일 테고.

좋은 거 열심히 좋아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구순까지 건강하게 살아야지. 하하.




얼마 전 읽기 시도했다가 포기한 책이 한 권 있다. 구매하고 수 년간 묵힌 이유도 포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텐데 역시나다. 영 읽기 힘들어서 '펼치기만 하면 열 페이지마다 졸고 있는 걸 보니 아직 읽을 준비가 안된 것 같다' 라고 하니 누군가 '공감하기 싫은 게 아니고요?' 라고 물어서 살짝 따끔했다.

어느 트위터 계정이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적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만 많은 시절'이라고 한 게 생각난다.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과는 별개로, 역시 너무 닫혀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도 잊지 말고.

하지만 재도전은 몇 달 뒤에 하는 것으로. 아직 부담감을 충분히 떨치진 못했다구.




지난 일주일 간 공연 보러 갈 일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혜화에 갈 용건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혜인과 ‘맛있는 거 먹읍시다’ 하고 만났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초밥집에 갔는데 홀 분위기는 아직 조금 어수선했지만, 메뉴 구성 간결하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가격에 비해 네타 상태나 두께감, 샤리도 입 안에 차라락 펼쳐지는 감과 씹히는 것 모두 좋았다. 곁들임으로 나오는 계란이나 우동 같은 것도 하나하나 깔끔하고 만족스러웠고. 가게 나오는 길에는 혜인과 둘 다 '수준에 비해 가격이 너무 낮아서 곧 사람도 많이 몰리고 가격이 오를 것 같다' 평했다.

처음 둘이 만난 날 갔던 카페로 이동해서 안락한 소파 자리를 골라 앉고 또 네 시간을 이야기 나눴다. 아마 혜인이 밤 공연이 없었거나 티켓을 처분하기로 결단했다면 밤 늦은 시간까지 더 길게 대화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보내는 시간이나 나누는 대화가 길어지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혜인은 정말 이야기꾼에 사람을 편하게 해줘서 단 한 번도 그런 불안을 느낀 적이 없다. 그런 혜인이 이번 주말 갑작스레 당일치기로 지방 공연을 다녀와야 할 지 모르던 나와 동행한다 할까 혼자 고민했었단 사려 깊은 말을 들을 땐 겉으로 티내지 않았지만 속에선 감동의 환호를 지르기도 했다. 이렇게 다정하고 내게 열려 있는 사람을 이 나이에도 또 사귈 수 있었어서 다행이다. 곧 생일이던데 잊지 않고 축하해야지.




축하-라고 하니까 생각 났는데, 작년 <스프링 어웨이크닝> 때부터 관심 갖고 지켜보던 배우 중 하나가 오늘로 데뷔 3주년이라고 한다.

얼마 전 재밌게 봤던 어느 공연의 출연 배우들도 데뷔한 지 이제 200일 된 신인들이 여럿이라 그런지 무대인사 때 많이 벅차 하는 것을 봤는데, 한동안 연차 오래된 배우들의 개운하게 웃으면서 훌훌 보내주는 인사말들에 익숙해진 터라 새삼 감회가 새롭고 나도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3주년을 맞은 배우도 갓 200일을 넘긴 배우들도, 앞으로 더 오래오래 무대에서 건강하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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