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
며칠 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다.
나의 막내누님이다.
가난한 시절, 공장에 다니며 내 학비를 보태던 누나는 결국 성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해 평생을 봉헌의 길로 걸으신다.
기도와 노동으로 하루를 세우는 분답게,
늘 단정했고, 단단했다.
차를 내어주시던 수녀님이 조용히 물으셨다.
“미카엘, 혹시 은진이 기억나니?”
그 이름 하나에, 묻어둔 시간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녀는 내 첫사랑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 해 동안 이어진 짝사랑이었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일방적이었지만,
그만큼 더 오래 아프고, 깊게 남았다.
중학교 3학년, 성당 학생회와 레지오 봉사로 매주 마주하던 아이.
빛이 닿은 듯 맑았고, 웃을 때마다 주일이 조금 더 특별해졌다.
나는 말 한마디 못 걸고, 그저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가 친구들과 웃으면, 이유도 모른 채 나도 따라 웃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그저 그런 아이였다.
평범했고,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 대학부 형이 과외를 해주던 자리에서 공부 잘하는 또래 남학생이 여학생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걸 봤다.
그때 처음으로 마음에 불이 일었다.
‘나도 저 아이보다 잘해보고 싶다.’
그 마음이 내 엔진이 되었다.
실업계로 보내려던 아버지를 설득해 인문계로 진학했고,
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는 그때부터 내 학비를 도왔다.
나는 밤마다 책상 앞에서 등을 구부렸고,
결국 서울의 그 대학에 합격했다.
성당 입구에는 축하 플래카드가 걸렸고,
신부님은 미사 끝에 내 이름을 불러 장학금을 건넸다.
서울로 올라가기 이틀 전,
나는 용기 내어 그녀에게 고백했다.
“오래 좋아했어.
방학 때 내려오면… 너 볼 수 있을까?”
하룻밤을 설레며 보냈다.
그다음 날, 친구가 편지 한 통을 전해주었다.
짧은 문장 하나가 마음에 못처럼 박혔다.
그 한 줄이 내 짝사랑의 끝이었다.
그날 이후, 성당 문턱을 넘지 않았다.
주일의 미사와, 신부님의 강론조차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세 해를 냉담했다.
그 아이를 잃으며, 믿음도 함께 멀어졌다.
세월이 흘러,
오늘의 내가 되어 수녀님 앞에 앉았다.
누님은 차를 들며 조용히 덧붙이셨다.
“세실리아… 그 후로 고생이 매우 많았어.
좋지 않은 사람 만나서, 오랫동안 힘들었지.”
그 말을 듣는데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서늘했다.
그녀가 웃던 얼굴보다,
이제는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녀의 한마디는 오래도록 내 안에 깊은 흉터로 남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말이 나를 자라게 했다.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건
사랑보다도, 때로는 거절이다.
이제 나는 안다.
그때 그녀가 내게서 찾지 못했던 ‘재미’란,
사실 평생 잃지 말아야 할 '진심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