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보기에 화사하게 꾸며도, 타고 넘어오는 역겨움
몇 년 전,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전세계를 휩쓸고 다니던 시절, 많은 영화 평론가들은 <기생충>의 중요한 모티프로 '냄새'를 꼽은 바 있다. '냄새'라는 것이 그 생활환경을 반영하기에 얼마나 빼기 힘든 냄새인지, 또 그렇기에 아무리 옷을 빼입는다 한들 그 냄새를 얼마나 숨기기 힘든지, 또 그것이 계급의 선을 타고 넘어오기에 '냄새'라는 것은 굉장히 무례하고 공격적인 것이라는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갑자기 때아닌 <기생충>의 '냄새'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가 어떤 현상을 인식하고 판단함에 있어 시각이 대부분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걸 내가 새삼 깨닫게 된 계기였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존 오브 인터레스트> 와 무슨 상관인가? - 시각을 기만하는 것만으로 가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으로 근무하던 실존인물 루돌프 회스의 이야기이다. 작중에서 회스의 가족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에 있는 집에서 귀여운 아이들과 화사한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히틀러가 강조했던 '모범적인 독일인'의 모습답게 그들의 집은 아주 깔끔하고 전원적이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화면의 색감 또한 아주 밝고 깨끗한 모습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평탄하게 흘러간다. 아내 헤트비히 회스가 친구들과 떠들고, 루돌프는 큰아들과 말을 타고, 아이들과 새로 장만한 카누를 타고 물놀이를 하고. 아무리 관찰 예능이 대세라지만 이렇게 2시간동안 관찰만 하라면 재미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서사적인 갈등이라면 루돌프 회스가 타 지역으로 전출을 갈 뻔 했다는 것 정도, 그리고 헤트비히는 몇 년 동안 일군 가족의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어했다는 것 정도. 장난하냐? 인사발령으로 기러기 아빠 되는 게 서사적 위기야?
당연하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지루한 플롯의 바닥 아래에 있다. 작중에서 회스 가족의 집은 아우슈비츠의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 뒤엔 늘 유대인들의 비명소리와 총소리, 소각로 소리로 가득 차있다. 그 끔찍한 소리들이 회스 가족에겐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겐 나치 군인들의 호통 소리와 유대인들의 비명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장면에서 영화 속 회스와 그의 큰아들은 왜가리 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묻는다.
<스포일러>
그들의 평화롭고 품위 있는 일상을 뜯어보면, 유대인들의 죽음으로 가득 차있다. 영화 초반부에서 헤트비히가 입는 코트와 발라보는 립스틱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대인들로부터 압수한 것. 회스의 큰아들이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것은 소각되고 남은 유대인의 치아. 회스의 작은아들이 따라하는 소리는 아우슈비츠에서 들리는 명령, 영화 후반부에서 정원의 거름으로 쓰이는 것은 유대인들을 화장한 재. 회스 가족의 작은아들이 창밖으로 들려오는 나치 장교들의 고함에 순수한 말투로 유대인들에게 "다시는 그러지마." 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이들 가족에게 이 비인간적인 행위가 얼마나 익숙하고 깊게 스며들었는지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회스 가족 본인들조차 때로는 자신들의 행위에 충격을 받고, 공포에 떤다는 점일 것이다. 강가에서 루돌프가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강을 통째로 뒤덮는 잿물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강에서 무언가를 집어내는데, 그것이 인간의 눈 부근 뼈라는 것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박박 씻기는 장면이 있다. 아이들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그 공포는 자기 손으로 전날까지 직장에서 직접 저지른 것이 아닌가?
그들 스스로도 저 감정의 밑바닥에서는, 분명히 이 행위에 대한 본능적 혐오감을 느낀다. 헤트비히는 전화통화로 "이번 작전에 우리 이름(회스 작전 :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유대인 절멸 작전)이 붙었다" 는 루돌프의 말에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얘기하고, 루돌프는 "'우리' 이름이지." 라고 강조한다. 그 말에 헤트비히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자신은 자러 가겠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책임을 발뺌하려는 것은, 분명 자신의 집 옆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스스로도 엮이고 싶지 않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루돌프는 전화를 끊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구토를 하려다 게워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두고 이동진 평론가는 "이미 소화해버린 악에 대하여" 라고 표현했다. 저 밑바닥에 깔린 인간으로서의 본능적 거부감 때문에 루돌프는 이를 게워내려 하지만 이미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먹고 소화해버린지 오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선사하는 영화적 체험은 시각에만 머물러있지 않다. 보통 영화에선 시각적인 쾌감을 음향이 기가 막히게 보조해주는 식이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 소리이다. 정확히 말하면 늘상 영화계에서 환상의 팀플레이를 보여주던 화면과 소리를 강제로 뜯어내 서로 2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 내내 싸우게 만든 것 같다.
시각과 청각의 기싸움에서 피어오르는 불쾌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가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역겨움과, 인지부조화에서 오는 공포감까지 갖게 만든다. 어쩌면 후각을 배제해야 하는 영화 예술에서, 그 모순적인 집의 기괴함을 가장 잘 표현한 연출이 아닐까 싶다. 헤트비히의 어머니 리나는 영화 초반부에 회스 가족의 집 정원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지만, 며칠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나버린다. 사실 독일인들에게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들의 인간성이 버티기 어려운 광기였으리라. 시체 타는 냄새, 밤새 타오르는 불과 피어오르는 연기, 총 소리와 비명소리. 아무리 포도나무를 심어 가리려고 해도, 아무리 예쁘게 정원을 꾸미고 외면하려 해도 시체 타는 냄새, 잿가루, 그리고 비명소리와 총소리는 담을 넘어 그들의 집을 침범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건조하게 유지된다. 카메라를 고정하고 찍어 화면이 정적인 것부터 영화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어떤 의도적 개입을 통으로 배제한다. 이 영화엔 줌인도, 줌아웃도 없다. 오로지 CCTV와 같은 앵글 변화와 수직, 수평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의 심리도, 어떤 서사도 느낄 수 없다. 이렇게 물기를 쭉 빼고 건조하게 준비한 영화라는 땔감 위에서, 죄 없는 육신은 활활 타오른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면의 연출에선 감탄이 나왔다. 사실 그냥 현실로 돌아오는 것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었는데, 하필 보여준 현재의 장면이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묵묵히 직원들이 청소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와...독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박물관을 구경하는 관람객에겐 그것을 보고 느끼는 인상과 감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매일같이 보고 먼지를 닦는 직원들에겐 어떤 감정이 없다. 박물관을 개장하기 전 청소하는 그 순간은, 어떤 감정의 개입 없이 추악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이다. 이토록 마지막까지 건조하게, 감정을 진공으로 밀봉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밀봉된 지퍼백 안에 방금까지 구역질을 하던 루돌프 회스가, 나치를 부역했던 "악의 평범성"이 아주 적나라하게 말라버린 채로 보관되어 있다.
1943년의 그들도 부지런히 청소하고, 2023년의 이들도 부지런히 청소한다. 1943년의 '모범적인 독일인'들은 부지런히 그들이 만든 추악한 잿가루를 닦아내려 애쓰지만, 2023년의 역사는 그들이 숨기고자 했던 추악함의 장소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그들이 뒤덮은 얼룩을 매일 닦아내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가해자의 시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담장 너머는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가해자인 회스 가족에 이입하는 선택지만 주어진다. 모범적인 중산층, 인사발령으로 인한 이사가 없길 바라고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는 소시민. 성실하고 단란한 그들은 우리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외면하려 애쓰는 담장 너머가 계속 거슬리는 것은, 영화 속 그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헤트비히는 교수형된 남편 루돌프와 달리 자신은 평범한 가정주부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이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받은 직후 수상 소감에서 "이 영화는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영화" 라고 밝히며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일들에 대해 비판했는데, 이에 비추어 무미건조하게 박물관을 청소하는 장면에 대해 "우리도 이런 악행의 증거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가?" 라고 비판하는 장면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본 것 같다. 영화 해석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고, 내 스스로 캐치하지 못한 부분이라 굳이 집중적으로 다루진 않았으나 적어도 영화 전체를 통해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과연 그들과 다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